21.02.13
더는 집에서 환자를 케어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병원으로 향한 날, 당신을 본 담당의사는 한참 침묵하다가 “이제 호스피스로 들어가야…”까지만 말하고 뒷말을 잇지 못했다. 일전에 그에게 호스피스 병동에 대해 물어볼 때는 “거기 자리 많아서 언제든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라고 했는데, 막상 입원하려니 말이 달라졌다. 대기 환자가 많으니 일단 응급실을 통해 일반 병동에 입원한 후 호스피스에 자리가 나면 옮기라고 했다. 그 절차에 따라 일반 병실로 입원했다.
당신과 함께 일반 병실에 있던 사흘 동안 내 마음이 한껏 쪼그라들었다. ‘결국 이 날이 오는구나. 우리가 호스피스로 들어가는구나’ 싶어서 자꾸만 울음이 비죽비죽 올라왔다. 재발했음을 공유하지 않아 이 상황을 무방비하게 맞게 한 의사가 원망스러웠고, 오른손 둘째손가락으로 본인 머리에 가져다 대고는 “무서워요, 여기가 무서워요”라던 당신이 얼마나 두려울까 싶어 마음이 무너졌다.
그곳에서 나는 한껏 조급해져서 무언가를 쓸데없이 열심히 준비했다. 일반 병동 간호사에게 호스피스 병동에 자리가 언제쯤 날지 물어보았다. 그는 “알 수 없어요. 내일일 수도 있고 몇 주가 걸릴 수도 있고. 보통은 3주 정도 기다려야 해요”라고 대답했다. 생각도 못한 대답을 듣고 얼어붙은 내게 지금이라도 얼른 다른 곳도 알아보라고 조언했다.
“보통은 대여섯 군데 예약 걸어두고 제일 빠른 곳으로 들어가시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간호사는 일반적인 상황을 이야기한 것일 뿐, 병원 내 호스피스 상황을 파악했던 것 같지는 않다. 분명 응급실에서 ‘곧 자리가 날 것 같다’는 호스피스 의사의 말을 들었고, 그 간호사와 대화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호스피스에서 ‘자리가 생겼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아직 울 때가 아니구나. 당신을 이 커튼 안에 갇혀 있다가 보낼 수도 있겠구나’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병원 밖을 나갈 수 없으니 믿을 곳은 SNS뿐이었다.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마음을 다해 알아봐준 지인들 덕분에 자리가 있는 호스피스 몇 군데를 알아냈고, 입원 상담도 받았다. 바로 들어갈 수 있다는 두 군데에 예약을 걸어두고 간호사에게 관련 서류를 부탁했다. 전화받고 상담받고 서류 떼고 당신 챙기기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시엄마는 자꾸 울며 전화해서 “하느님께 기도하라”고 했다. 그놈의 기도, 기도, 기도. 지금 기도가 문제인가. 당신 아들 갈 곳 없어서 나앉게 생겼다고!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한껏 짓누르며 시엄마에게 “호스피스나 좀 알아보시라”고 일갈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래층에서 혼자 조급해하며 머릿속으로 지지고 볶고 있을 때, 위층 호스피스에서는 우리를 맞을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 중이었다. 오후쯤 호스피스 병동에서 연락이 왔다. 자리가 생겼으니 오늘 중으로 몇 가지 서류 작업을 진행하고 이사하자고 했다. ‘자리가 생겼다’는 말은 즉 ‘오늘 한 생명이 떠났다’는 말과 동의어일 텐데, 당시에는 내 상황만 눈에 들어온 나머지 마냥 기쁘기만 했다.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기 전 관계자가 몇 가지 인터뷰를 진행했던 기억이 난다. 그는 내게 “연명의료 거부 서류에 동의하셔야 한다”고 말했다. 연명의료는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인공호흡기, 수혈, 삽관 등 일곱 가지 인위적인 행위를 뜻한다. 호스피스는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마지막을 돕는 곳이기에 연명의료 거부가 필수다. 호스피스 병동의 또 하나의 원칙 가운데 하나가 ‘의식이 없는 환자는 들이지 않는다’인데, 의식 없는 환자는 연명의료 계획서에 직접 사인을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당시에 당신 정신은 오래된 형광등처럼 잠깐 들어왔다 다시 나가기를 반복하던 때였다. 당신을 대신해 대답했다. “환희 씨는 평소에도 연명의료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혹시 가망이 없는데 병원에서 안락사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스위스로 떠나 자발적 안락사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분이 물었다. “그 말, 기록이 있나요?”
종종 쓸데없이 혼자 조급해서 이곳저곳에 전화를 돌리며 허둥대던 내 모습과, “기록이 있나요?”라고 묻던 관계자의 말투, ‘호스피스에 못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 건가’ 싶어서 망연자실했던 내 심정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당신이 평소에 ‘연명치료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도 녹음이든 글이든 기록이 없다면 연명의료를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병원에서는 ‘의중’이 아닌 ‘증거’만 필요했다. 당신의 정신이 온전하고 내게 여유가 있을 때 준비해두었어야 하는 것들이었는데. 내 미숙함이 민망하다.
내 마지막은 어떤 모습일까. 되도록 그 순간이 존엄했으면 좋겠다. 미련을 덕지덕지 붙인 채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며 연명치료 일곱 가지를 돌아가며 시도하다가 결국 누더기가 된 몸으로 당신 곁으로 가고 싶지는 않다. 당신 없는 나는 아마도 혼자 눈을 감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내 죽음을 스스로 준비해야겠다. 조만간 건강보험공단에 가 사전연명의료 의향서를 작성해놓으려 한다. 내 의중을 증거로 만들어놓는 기본 절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