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15.
당신이 떠나기 전까지 내 머릿속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당신에게 울며불며 매달리고, 원망할 대상에게 소리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최대한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노력했다. 아프고 힘들어하는 건 당신 떠나고 해도 충분하니까, 지금은 당신을 지켜야 하니까. 의사로부터 당신의 사망을 확정받고, 병원 14층 호스피스 병동에서 지하 1층 장례식장으로 이동하면서부터 긴장이 풀렸다. 그 때문인지 장례식장 안에서의 사흘은 단편적으로 기억날 뿐이다. 상대의 “지은 씨 장례식장에서 나한테 이런 말했잖아요”라고 말 앞에서 “그랬나요? 기억이 안 나요”라고 답변할 때가 잦다. 내 슬픔에 취해 있었는지, 장례식장에서 나와 직접 말을 붙였다는데도 그분을 만난 기억이 없는 경우도 있다.
당시에는 그저 ‘이제 다 끝났으니 나도 좀 마음껏 슬퍼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했던 것 같다. 시엄마와의 지겨운 줄다리기도, 당신이 언제 떠날지 몰라 불안하던 마음도, 울음을 참고 냉정해지려던 노력도 다 내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안겨 울 때 ‘마스크 덕분에 마음껏 울 수 있구나. 코로나도 좋은 점이 있네’라고 생각했던 기억도 얼핏 난다.
그러나 마음만큼 한껏 슬퍼할 수는 없었다. 내가 슬퍼하면 힘들어할 가족들 때문에 꼿꼿하게 앉아 자리를 지켰다. 그러다 보니 이 모든 절차가 얼른 끝나고 가만히 침체되어버릴 날만 기다렸다. 엄마는 그런 내가 밑바닥으로 꺼져버릴까 봐 전전긍긍했다. 당신을 입관하는 날, 엄마는 우황첨심원을 사와서 내 손에 기어이 쥐어주고 갔다. 오히려 나는 그 알약을 보며 ‘왜 우리 엄마는 내가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하게 막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당신의 입관 앞에 한없이 울다가 혼절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그럼에도 엄마 마음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어서 말없이 그 약을 받아먹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엄마가 내 슬픔을 방해하는 존재로 느껴졌던 것은. 혼자 집에 남은 내가 걱정되어 본인 집으로 떠나지 못하는 엄마에게 얼마나 많은 퉁바리를 놓았는지 모른다. 당시 낮에 상속 관련 업무를 처리하고 저녁에 당신이 남긴 블로그·페이스북 글들을 찾아 읽고 있는 것으로 내 하루는 꽉 짜여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 엄마는 내 눈치를 살피며 밥을 먹이고, 집안 청소를 하고, 화분의 위치 같은 것들을 조언했다. 그때마다 ‘당신 글 읽어야 하는데 엄마가 자꾸 말 시켜서 흐름 끊긴다’고 속으로 짜증을 냈던 것 같다. 지나치게 나를 배려하는 엄마에게 크게 화를 내기도 했다. 엄마를 보며 생각했다. ‘엄마는 정말 나를 너무 몰라.’
얼마 전 엄마 집에 갔을 때 일이다. 엄마가 무의식적으로 베푼 배려가 내게 지나친 간섭으로 느껴져 ‘그러지 말라’고 했다. 엄마는 ‘관심이 있으니 고칠 부분이 보이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냐’고 물었다. 그 말에 기어이 한마디 하고야 말았다.
“엄마는 내가 밥을 먹으면 곧바로 사과를 내오고, 사과를 다 먹으면 곧바로 커피를 내오잖아요. 나는 그게 싫다는 거야. 나한테 모든 안테나를 세워놓지 말라고.”
그러고서는 기어이 “남한테 너무 신경 쓰지 마요”라고 덧붙였다. 엄마는 “우리가 왜 남이냐”고 물었고, 나는 “그럼 엄마가 남이지, 엄마가 나냐”고 대거리했다. 엄마와 딸의 오고 가는 핑퐁 게임 앞에서 동생은 눈알만 굴렸다. 여기서 엄마가 한마디를 날렸다.
“나는 나중에 늙어도 너랑 살면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언젠가 엄마에게 “이제 엄마도 혼자고 나도 혼자니 그냥 같이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넌지시 물은 적이 있다. 그때는 엄마도 “엄마는 좋아.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라고 대답했다. 근데 이제는 나와 살지 않겠다니? 말싸움에서만큼은 엄마한테 절대 지지 않는 나다. 엄마가 하는 말의 패턴을 전부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헌데 저 말을 듣는 순간 전투력을 상실했다. 대충 얼버무리며 “아, 나도 안 살아. 나 말고 쟤랑 살아요”라며 가만히 있던 동생에게 떠넘기고 입을 닫아버렸다. 엄마는 “쟤랑도 안 살아”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고, 어째서 저 말이 그리 충격적이었는지 곰곰 생각해보았다. 아마 엄마는 나를 받쳐주는 사람일 뿐, 나를 거부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의 동거에 ‘오케이’ 또는 ‘노’를 외칠 결정권은 나에게만 있는 줄 알았던 것이다. 엄마의 한마디는 ‘엄마도 너를 거부할 수 있다’는 선언 같았다. 앞으로 엄마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선언. 남편 잃은 유세 떨지 말라는 경고. 나보다 남편을 잃어도 먼저 잃어 보았고, 살아도 20여 년은 더 살았으니 까불지 말라는 옐로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