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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스타시아 Feb 16. 2021

시한부 인생과 로또

21.02.16.

25일은 월급날이다. 이날 내 급여뿐 아니라 한 가지 더 들어온다. 유족연금. 당신이 국민연금 받을 나이를 채우지 못하고 고인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유족인 나에게 매달 얼마간 보내준다. 이 돈이 들어오는 날이면 국민연금공단에서 메시지를 보낸다. “이지은 님, 오늘은 **은행 통장으로 국민연금이 들어오는 든든한 날입니다.”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당신이 겪지 못할 ‘만 60세 노인 이환희’를 떠올린다.


처음 결혼했을 때 우리는 서로 가지고 있던 물건을 그대로 합쳐 살림을 차렸다. 장롱과 피규어장, 이불만 샀고 나머지는 그대로였다. 내 그릇에 당신 그릇을 포개고, 내 수건을 당신 수건과 더하고, 내 책과 당신 책을 결혼시켰다. 내 고양이 둘, 당신과 당신의 피규어들이 합쳐져 15평짜리 신혼집에 들어앉았다. 8평짜리 원룸에 살던 나와, 5평짜리 원룸에 살던 당신에게 그 집은 세상에서 가장 넓고 포근했다. 우리는 그 작은 집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이곳에 평생 살기를 소원하기도 했다.


당신이 서울로 회사를 옮긴 후 퇴근도 점차 늦어지고 얼굴에 근심도 가득해지면서 나 또한 걱정이 많아졌다. 전 회사를 다닐 때 당신은 스트레스받으면 카스텔라 빵을 구웠는데, 이제는 빵 구울 힘도 없다고 했다. 내가 무엇을 도울 수 있을지 혼자 고민하다가 ‘서울로 이사하자’고 했다. 출퇴근 시간이라도 덜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당신의 출퇴근을 덜어주기 위해 이사하겠다는 근시안적인 대책을 내놓을 때, 당신 마음속에는 새로운 불안이 싹트고 있었다. 일을 사랑하는 크기만큼 이 불안도 같이 부풀어져갔다.


‘이 업계에서 편집자로 일하는 시기가 길어봤자 10년인데 그 이후에는 뭐하며 먹고살지? 지은 씨네 원가족은 노후 준비도 부족해 보이는데 그분들 노후는 어떻게 대비하지? 연금으로 먹고살 수 있는 우리 부모와 달리 우리는 연금도 없는데 노후는 어쩌지?’


종종 당신은 이런 걱정을 나에게 드러냈는데, 나는 “아, 걱정하지 마. 이환희 하나쯤 이 누님이 먹여살릴 테니까”라며 농담처럼 받아들였다. 시아빠는 “권정생 선생이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 아나?”라는 말로 당신의 걱정을 사치스럽게 여겼고, 시엄마는 “하느님께 기도하면 다 해결해주셔”라는 비이성적인 처방을 내렸다. 이때 내가 당신을 앉혀놓고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플랜을 보여주었다면 어땠을까. 당신이 불안과 걱정을 한시름 덜어놓을 수 있었을 텐데. 머릿속에 종양이 생긴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어떻게 막을 수 없는 지점이었지만 돈이 주는 불안만큼은 얼마간 덜어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하다못해 노후에 15평 신혼집 수준으로 다시 돌아가면 되는 일 아니냐고 윽박이라도 질러볼 것을.



종양이 뇌를 조금씩 잡아먹으면서 당신에게서 비이성적인 행동이 자꾸 늘어났을 때, 당신은 한 민간업체에서 운영하는 ‘로또 번호 알려주는 업체’에 돈을 주고 가입했다. 회원이 되면 3등 번호에 당첨될 때까지 계속 번호를 알려준다고 했다. 일주일에 두 번, 한번에 다섯 개씩 총 열 개의 로또 번호가 선정되어 왔다. 랜덤으로 선정되는 번호를 걔들이 어떻게 안다고 회원으로 가입하나.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당신이 하도 진지하기에 그냥 놔뒀다. 당신은 꼬박꼬박 이 로또를 사러 갔다. 집 근처에 로또 파는 데가 없어서 내가 직접 차로 당신을 태워 로또 가게 앞에 내려다주기도 했다. 


집에서 요양할 때 당신은 살 것도 없으면서 지갑을 꼭꼭 챙겼다. 지갑 한쪽에는 당첨을 기다리는 로또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종종 “로또 사러 가야 해”라고 말했다. 그때마다 동생이나 아주버니에게 “오실 때 로또 좀 사다주세요. 번호는…”으로 시작하는 문자를 보냈다. 그 업체에서 선정한 번호들이었다. 당신에게 그 로또를 쥐어주고 함께 맞추어보기도 했다. 한번은 5,000원이 당첨되었다. 우리가 축하한다고 손뼉을 쳐주었더니 매형 가지라며 호기롭게 로또를 내밀었다. 로또, 로또 노래를 부르더니 막상 당첨되니 호기롭게 남에게 줘버리는 저 행동은 또 무언가. 내일모레 떠날 사람과 로또는 너무 간극이 크기 때문에 매형에게 양보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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