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18.
결혼 전에는 회사 근처 주택가 밀집 지역에 살았다. 오전 8시 30분에 집을 나서면 55분쯤 회사에 도착했다. 두세 개 아파트 단지를 지나고, 다리 하나를 건너 웨스턴돔이라는 번화가를 벗어나면 회색빛 회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처럼 걷지 않는 세상에, 그것도 아침 시간에 25분 거리를 두 발로 걷는다고 말하면 다들 놀랐다. 그저 아파트 단지 정원에서 해바라기하는 동네 고양이도 구경하고, 잘 정돈된 길을 천천히 걷는 시간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 길을 걷는 순간에는 출퇴근 나온 직장인이 아니라 산책 나온 한량이 된 느낌이었다. 이 길을 걷는 시간을 사랑한 덕분에 그 회사에 비교적 오래 발붙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길을 사랑한 이유는 몇 가지 더 있다. 그곳은 우리가 첫키스한 장소이자 당신이 프로포즈한 곳이기 때문이다. 연애 초반이라 서로 조심스러워할 때, 당신은 걸어서 퇴근하는 나를 위해 그 길을 같이 걸어주었다. 함께 웨스턴돔 어딘가에서 저녁을 먹고, 카페에서 수다를 나누며 시간을 공유했음에도 헤어지기 아쉬워서 그 길을 함께 걷자고 했을 것이다. 늦은 시간이 되어 인적이 드물어진 그 길을 두 손 잡고 천천히 걸었다. 아무리 발걸음을 느리게 만들어보아도 집은 금세 도착했다. 좀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은 당신도 마찬가지여서, 벤치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에 앉아 있다가 가자”고 제안했다. 당신의 손가락은 ‘저기에 벤치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으슥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가로등이 고장 났는지, 아니면 원래 어두운 곳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속으로 ‘불량청소년이 돈 뜯으러 올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둘이 벤치에 마주 앉았다. 당신은 평소에 가방에 생수와 죽염을 가지고 다녔다. 수시로 죽염을 먹으며 생수를 들이켜야 건강에 좋다고 했다. 그날도 당신은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더니 물을 마셨다. 몇 모금쯤 들이켠 다음에 나에게 “지은 씨도 마셔요”라고 권했다. 별로 목마르지 않았으나 주니까 받아 마셨다. 나중에 왜 그때 물을 자꾸 마시고 나보고도 권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긴장해서 자꾸 입술이 말라서”라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벤치에 앉힌 것도, 물을 먹인 것도 다 거사를 치르기 위한 사전 준비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내가 아끼던 그 길 그 벤치에서 첫 키스를 했다. 당신의 입술에서는 죽염 맛이 났다.
키스한 다음에 당신은 집에 가야 된다고 했다. 내일 오전까지 넘겨야 할 일이 있는데 아직 못 끝내서 마저 하고 자야 된다나.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이 남자, 장난하나. 가긴 어딜 가. 중학생이야 뭐야. 키스만 하고 가는 게 어디 있어!’
하지만 나는 침착했다. 다수의 연애 경험으로 다져진 내가 당신을 붙잡을 방법쯤은 알고 있었다. 요즘에는 “라면 먹고 갈래요?”가 상대를 붙잡는 관용어로 통용되지만, 나에게는 그런 말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 집 고양이 보고 갈래요?”
그러나 상대는 손만 잡아도 바들바들 떠는 이환희 씨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렇게 순진한 우리의 이환희 씨는 내 자취방에 들어와 우리 집 고양이들을 구경하고는 일해야 된다며 차 끊기기 전에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