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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스타시아 Feb 20. 2021

잠옷에 깃든 당신의 냄새

21.02.20.

우리가 함께일 때도 나는 당신 옷을 입고 자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하도 당신 잠옷을 빼앗아 입다 보니 당신이 “아, 자기 때문에 나는 입을 잠옷이 없잖아”라며 투덜거리기도 했다. 결국 상주 집에 내려가 20대 때 입던 낡은 옷들을 전부 가지고 올라오더니 본인 잠옷 개수를 두 배로 만드는 방법을 착안해냈다. 그 옷들을 나누어 입고 다녔다.      


자꾸 당신 잠옷을 입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속옷을 입지 않아도 티가 나지 않았고, 여자 옷들에 비해 훨씬 품이 넓어서 편했다. 우연히 빨랫감에 내 잠옷이 전부 들어가버렸을 때 한번 얻어 입었다가 신세계를 맛보고는 이후로는 계속 당신 잠옷을 탐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투덜거리는 당신을 보는 게 즐거웠기 때문이다. 내가 즐겨 입던 잠옷을 걸친 당신을 보면 “내놔. 그거 내 잠옷이야”라며 장난을 치고는 했다. “아, 원래 내 거잖아”라고 항변하는 당신 귀에 대고 “잘 들어, 이환희. 네 것도 내 것이고, 내 것도 내 것이야”라고 속삭여준 뒤에 낄낄거렸다. 남들 앞에서는 한껏 까칠하고 근엄한 나인데, 당신 앞에서는 10대마냥 장난기 넘쳤다.     


지금은 거리낄 것 없이 당신 잠옷을 걸치고 산다. 내가 당신 잠옷을 전부 독점한데도 투덜거릴 당신이 없으니까. 헌데 정말 이상한 게, 당신 잠옷을 입고 벗을 때마다 당신 냄새가 스쳐 지나간다. 그 냄새를 느낄 때마다 한 번 더 맡아보려고 잠옷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면 절대 다시 안 난다. 옷이 콧등을 스쳐지나갈 찰나에만, 그것도 매번 나는 게 아니라 무의식중에 옷을 갈아입을 때만 가끔씩 맡을 수 있다. 벌써 몇 번이나 빨래를 돌린 옷인데 어떻게 당신 냄새가 아직도 날까. 신기하다.     


그러다 보니 종종 시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환희 씨 옷 좀 돌려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이미 시아빠와 당신 누나, 조카들이 당신을 대신해 열심히 잘 입고 다니고 있을 텐데, 게다가 당신이 내 소유물도 아닌데, 이미 줘버린 그 옷들을 돌려달라는 말이 얼마나 치사한가. 안다. 너무 잘 안다. 그 말을 들으면 나라도 “얘 뭐야. 왜 줬다가 뺐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당신 냄새가 너무 그리워서, 어쩌면 당신의 다른 옷에서도 나지 않을까 싶어서 ‘옷 돌려달라’는 그 말이 매번 혀끝에 맴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당신이 입고 자던 옷들을 따로 보관해놓을 걸 그랬다.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을 때 그 옷들 들여다보고 냄새 맡아보고 더듬어볼 것을. 요즘 들어 자꾸만 하나둘씩 사라지는 당신의 흔적이 아쉽고 아쉽다. 우리는 왜 사진과 영상에 그렇게 인색하게 굴었을까. 사진 같은 거 SNS에 보여주기를 위한 용일 뿐, 함께하는 현재에 집중하는 편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어리석었다. 우리에게 남은 날이 수없이 많이 이어질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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