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21.
《더해빙》은 당신이 병을 앓았으나 정신은 온전할 때 읽은 책 가운데 한 권이다. 당신의 손이 탄 그 책 안에 온통 밑줄이 그어져 있다. 당신이 밑줄을 쳐둔 문장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평소 전혀 감응하던 분야가 아닌데 왜 이 책을 그토록 열심히 살폈을까. ‘인생의 그루’라고 불리는 사람의 책 안에서 무슨 답을 찾고 싶었던 것일까. 그 문장들에 밑줄을 그으며 당신은 속으로 무슨 꿈을 꾸었을까. 경력이 단절된 편집자의 시간을 극복하려면 유명한 베스트셀러들을 읽고 분석해놓아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에 읽었을 것 같기도 하고, ‘하면 된다’ 정신으로 삶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서 밑줄 그었을 것 같기도 하다. 둘 가운데 어떤 마음으로 그 책을 집어 들었다고 상상해보아도 저릿해지는 마음은 매한가지다. 당신이 무슨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얼마나 살고 싶어 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니까.
당신은 《더해빙》 말고도 ‘암, 나을 수 있다’ 같은 류의 건강서들도 함께 읽었다. ‘2쇄나 찍었을까’ 싶게 생긴 표지와 제목이 두드러지는 그 책들은 모두 시엄마가 보낸 책들이었다. 시엄마가 신처럼 떠받드는, ‘낫는다고 믿으면 무조건 낫는다’고 말하는 전**의 책, ‘암은 세포 이상일 뿐이며, 세포 때문에 죽는 사람은 없으며, 몸에 산소를 많이 삽입해주면 자연히 낫는다’고 주장하는 윤**의 책 같은 것들이다. 그 책들에서도 당신의 밑줄은 종종 발견된다. 당신 옆에서 그 책들을 함께 들여다본 적이 있다. 나는 당신에게 “주장만 있고 증거가 없는, 심지어 같은 말만 반복하는 내용들”이라고 말했다. 당신은 “응, 좀 그렇지” 말하고 빙긋 웃었다. 그때 나는 왜 평가의 위치에 서 있었을까. 만약 당신 앞에서 다시 그 책들에 대해 말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책들 읽고 삶에 반영하고 싶은 게 있었어?”라고 되묻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최대한 실천해줄 것이다.
아프기 전에는 좀처럼 하지 않던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게 한 가지 더 있다. 성당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결혼하고서 “미사만큼은 빼먹지 말자”고 서로 약속했으나 쉽게 지키지는 못했다. 바라는 게 없고 마음이 편안해지니 자연스럽게 종교와 멀어졌다. 시엄마의 “성당 갔니?” 물어보는 전화를 받으면 그제야 마지못해 나가곤 했다. 그마저도 부활절과 크리스마스처럼 천주교에서 크게 중요하다고 여기는 행사에만 참여했다. 성당에서 나누어준 ‘성사표’를 제출하기 위해서였다. 성당에 매주 나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냉담자’로 분류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성사표를 두 번 이상 제출하지 않으면 냉담자로 분류되어 리스트가 교구로 넘어간다). 당신과 리아가 동시에 아프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당에 다시 나갔다. 간절히 원하는 바가 생긴 것이다. 하느님과 성모님은 힘들 때만 찾아오는 우리가 얄미우면서도 안쓰러웠을 것 같다.
성당 의자에 앉아 당신과 나는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빌었다. 당신은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당신이 두 손 모아 소중히 빌던 그 소원들은 이루어졌을까. 내가 당신 옆에 앉아 곱게 빌던 그 소원들은 단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