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23.
당신은 선물을 기꺼워한 적이 거의 없다. 기본적으로 소유나 소비에 비판적인 타입이기도 했고, 필요한 것들은 이미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패션에도 큰 관심이 없어서, 유니클로 같은 무난한 옷을 파는 상점에서 한 가지 스타일 옷을 검정색·회색·흰색 세 벌씩 사서 돌려 입었다. 옷은 계절별로 검정색·회색·흰색 맨투맨, 검정색·회색·흰색 후드티, 검정색·회색 면바지, 사계절용 청바지 몇 벌이 당신이 가진 전부였다. 겨울용 청바지가 따로 있다는 사실도 나와 사귀면서 알았다. 연애 초반에 기모가 들어간 팥죽색 맨투맨 티를 선물해주었더니, “아, 고마워요. 이렇게 두꺼운 티 처음 입어봐요”, “이렇게 컬러 있는 옷 처음이에요”라고 말했다. 어떤 점퍼는 10년 되었다고 하고, 어떤 것은 15년 되었다고도 했다. 옷도 함부로 버리는 법이 없어서, 구멍이 날 때까지 입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한번 애정을 주면 끝까지 가져가는 타입이었다.
양말은 가판대에서 열 묶음에 5천 원 정도 하는 회색 발목양말을 샀다. 그래야 양말 한 짝이 구멍 나서 버려도 혼자 노는 양말이 없기 때문이다. 신발은 검정색 스니커즈만 샀다. “왜 스니커즈만 신느냐”고 물었더니 “바닥에 붙어 있는 게 좋아서”라고 했다. 아마 무난하기 때문에 선호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튀는 색이나 독특한 스타일은 거의 고르지 않았다. 언제나 지금 가진 것에 충만해했다.
몸에 무언가 걸치는 것조차 불편해해서, 흔히 연말 선물로 주고받는 목도리나 장갑, 패션양말 같은 것들이 포장지에 싸인 채 장롱 안에 뒹굴고 다니기 일쑤였다. 핸드크림, 수첩 같은 실용적인 물건들조차 선물받는 대로 책상 위나 서랍 안에 쌓아놓았다. 그 물건들은 대부분 내가 대신 사용했다.
가지고 싶어 하는 것도 없고, 필요한 물건도 없다 보니, 누구도 당신을 기쁘게 할 만한 선물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당신은 그 어떤 기념일 앞에서도 늘 “혹시 몰라서 말하는데 선물 살 생각하지 마”라고 선수쳤다. 그래도 사람 마음이 그게 아니어서, 무언가 당신이 기쁘게 받을 만한 선물을 주고 싶고, 그 앞에서 기뻐하는 당신을 보고 싶었다. 나는 늘 고심하다가 ‘커플용’으로 선물을 골랐다. 당신은 커플 신발, 커플 티, 커플 점퍼 같은 선물들에는 관대했다. ‘함께’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서 그러했을 것이다. 아니, 이제 와 생각해보니 어쩌면 나를 위해 기뻐하는 척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주말에 당신이 있는 용인 수목장에 가기로 했다. 당신이 떠난 지 100일째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런 날도 나름의 기념일로 쳐야 하는 것일까. 기념일이라면 어떤 선물을 주어야 할까. 살아서도 그다지 선물의 기쁨을 모르던 당신인데, 이제 세상에 없는 마당에 무엇으로 당신을 기쁘게 해줄 수 있나. 수목장 그곳에서 당신에게 주어진 자리는 두 뼘 남짓한 공간이 전부다. 그 앞에 앉아 간단한 다과를 차려놓을 수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집으로 돌아갈 때는 전부 회수해야 한다. 한번은 엄마가 당신에게 막걸리를 한 통 부어주다가 관리인에게 ‘잔디 상한다’며 한소리 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이거라도 차려주고 싶어서 꼬박꼬박 막걸리와 간단한 다과를 챙긴다. 주변에 누가 없는지 눈치를 살핀 뒤에 막걸리 한 잔을 당신 위에 몰래 뿌려준다.
어제는 당신에게 예뻐 보이고 싶어서 원피스를 한 벌 샀고, ‘영원한 사랑’이 꽃말이라는 튤립 조화를 몇 송이 주문했다. 튤립은 벌써 왔는데 꼭 진짜 꽃 같더라. 그날에는 당신이 봄마다 찾던 스타벅스 슈크림라떼와 제철 딸기도 사가야지. 소박하지만 내 나름의 정성을 모아 차려놓은 선물을 앞에 둔 당신은 분명 ‘아이코, 뭐 이런 걸 사왔어. 자기’라고 말하며 해맑게 웃어줄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