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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스타시아 Feb 26. 2021

프러포즈의 추억

21.02.26.

언젠가 가수 이효리가 예능에 나와서 자신이 바람을 필까봐 반려인 이상순과의 결혼을 망설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예능 진행자들은 그 말을 듣고 와르르 웃었지만, 나는 그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결혼 제도는 인간이라는 불확실성을 간과하고 있다. 자기 마음이 언제 어떻게 바뀔 줄 알고 결혼이라는 제도에 뛰어드나. 나조차도 나를 못 믿는데, 나는 물론이고 남까지 믿어야 하는 그 결혼을 어떻게 지속하는 말인가. 어떻게 타인을 믿고 평생 함께하겠다고 장담하나. 그 불완전한 사랑을 믿는다는 것인가?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이런 사고방식이 내 결혼관을 지배했고,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비혼주의를 자처했다. 이런 내가 당신에게 먼저 결혼하자고 제안했으니 돌아보면 신기하다.


당신과 결혼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간단한다. 당신은 내게 “내가 나로서 온전히 존재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이전의 연애 상대들은 나를 자신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한 무언가로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한 고집하는 나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고, 그러고 보니 연애는 늘 알력다툼의 연속이었다. 반면에 당신은 지금의 나로 충분하다고 격려해주었다. 내가 그냥 나라서 좋다고 말해주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사람이라면 평생 함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당신과 함께 있으면 편안했다. 당신이 내게 속마음을 고백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던 세월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우리는 잘 맞았다. 나는 기꺼이 당신을 공부했다. 당신 같은 유형의 이성을 접해본 적이 거의 없어서, 당신을 연구하느라 하루를 다 보냈다. 당신이 좋아한다는 윤종신 노래를 찾아 들어보고 “나는 〈1월부터 6월까지〉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라고 말해주었더니, “나도!”라고 말하며 신나 했다. 서로를 공부하는 시간이 좋았다. 매일 좀더 열심히 당신을 배우고 싶었다.


이런 연유로 당신에게 결혼하자고 제안했고, 곧이어 원가족에게 결혼을 ‘통보’했다.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지, 부모의 허락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집에 “올해 결혼하기로 했으니 그렇게 알아요”라고 말했다. 내 동생은 그 통보가 꼭 “올해 여름휴가를 어디어디로 가기로 했으니 그렇게 알아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고 한다. 원가족은 황당해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가 원래 좀 가모장적이다.



‘결혼하자’고 말했으면 그걸로 이야기 끝난 건 줄 알았는데, 그와 프러포즈는 별도의 이야기인가 보다. 그와 관련된 녹음 파일이 하나 있다. 아마도 당신이 통화하다가 잘못 눌러 자동으로 녹음된 것 같다. 당신이 시아빠에게 “지은이가 먼저 결혼하자고 했는걸”이라 자랑하며 해맑게 웃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신의 말에 시아빠는 “그래도 그게 아니다. 평생 욕먹기 싫으면 꼭 정식으로 프러포즈해라”고 조언한다. 그 말 때문인가. 당신은 정말로 프러포즈를 준비했다.


4월 9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주말이었다. 당신은 내게 “우리 여의도로 데이트 가자”고 제안했다. 벚꽃을 보기 위해 여의도에서 만났다. 예상한 대로 엄청난 인파가 여의도를 가득 메웠다. 그 벚꽃 길에 행사가 많았던 기억이 난다. 왜인지 모르지만 호박마차도 진열되어 있고, 전국노래자랑도 열렸다. 신난 나는 혼자 호박마차에도 들어가 보고, 전국노래자랑 무대도 구경하고, 쉴 새 없이 사진을 찍었다. 그날 일기를 보면, 당신에게 “중국 사람이 엄청 많네. 역시 여행을 가면 부지런해지는 것 같아”라며 관찰일기류 수다를 던지고, “면세점에서 캐리어 대형을 사면 어떻게 들고 기내에 탑승하지?”라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하고, “전국노래자랑은 어른들이 진짜 좋아해. 나 10대 때는 뮤직뱅크였는데” 같은 쓸데없는 추억팔이에다가 “어머, 저 여자 분은 스타킹 안 신어서 너무 춥겠다”라는 남 걱정까지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고 적혀 있다. 그날 당신은 계속 안절부절못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내 수다에 취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여의도 데이트는 이미 끝났는데 당신이 일산까지 바래다준다고 했다. 둘 다 뚜벅이인 관계로 지하철에 버스 타고 가는 것이니 바래다준다기보다는 함께 타고 가는 것에 더 가까웠지만, 기꺼이 오케이했다. 마두역에 내려서 집까지 15~20분 정도 걸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당신은 조급했다고 한다. 횡단보도만 건너면 내 자취방이 나오는 길 한가운데에서 당신이 나를 불러 세웠다. 왜 그러냐고 묻는 나의 양쪽 어깨를 살포시 잡더니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나게끔 살짝 밀었다. 그 자리에는 벚꽃나무 대신 분홍색 꽃이 핀 목련나무가 있었다.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가만히 있어 보라고 말하더니 가방에서 주섬주섬 꽃다발과 갈색 케이스를 꺼냈다. 그제야 이게 프러포즈임을 알았다. 벚꽃 흐드러지게 핀 곳에서 주고 싶었는데 사람도 너무 많고 타이밍도 못 잡아서 여기까지 왔다고 속상해하는 당신이 너무 귀여웠다. 비록 아파트 단지 길 목련나무 앞이었지만 내게는 그 어느 장소보다 근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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