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25.
생명을 가진 존재는 언젠가 죽는다. 당신을 잃기 전까지 이 당연한 명제를 간과하고 살았다. 그 전에는 ‘누구나 죽는다’는 문장을 이렇게 받아들었다. ‘언젠가 죽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는 안다. 나는 그저 지금까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병에 걸리든 사고를 당하든 불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건, 내 목숨을 가져갈 만한 사건은 큰 인기척을 내며 다가오지 않는다. 어느 날 우연히 잘못 걸려온 전화처럼, 예상도 못한 순간에 갑자기 들이닥친다. 흔히 말하는 ‘가는 데 순서 없어’라는 말이 얼마나 적확한 표현인지 지금은 안다.
당신의 부재는 내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덕분에 이제 나는 매일같이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오지 않을 내일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바로 쓰러져도 며칠 뒤에 발견될지 알 수 없다. 내 휴대전화에 비상연락망은 당신 번호이지만, 비상시 연락받을 이는 없다. 슬프게도 사실이다.
나는 어떤 식으로 삶을 마감할 수 있을까. 당신은 그 어떤 연명치료도 진행하지 않았음에도 하루하루 힘들게 버티다가 겨우 삶을 마감했다. 온전했던 한 사람이 세상에서 조금씩 사그라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 언젠가 다가올 나의 미래를 상상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죽음을 정리시켜줄 내가 존재했지만, 내 마지막에는 누구도 곁에 없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 나는 스스로 내 삶을 단순화시켜놓아야만 한다.
덕분에 더는 3년 후, 5년 후를 상상하지 않는다. 이전에는 두루뭉술하게나마 3년 후, 5년 후, 10년 후의 계획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 계획들은 당신이 사라지면서 전부 무너졌고, 이제 나는 내년의 나조차 믿지 않는다. 어떤 일이든 그때 가보아야 아는 것이다. 어차피 내가 살아 있지 않다면 전부 무너질 계획들이다.
이제는 삶이 아닌 죽음을 계획할 생각이다. 나는 이상적인 죽음을 꿈꾼다. 내 마지막이 되도록 존엄했으면 좋겠다. 그 ‘존엄’이라는 단어를 구체화시키기 위해 계속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굴려보고 있다. 최근에 《작별 일기》를 읽으며 그 존엄의 단초를 발견했다. 바로 ‘자유 죽음’이다. 지나치게 노쇠하기 전에, 내 의지에 벗어날 정도로 몸과 마음이 망가지기 전에 내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 방법을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며 고개를 가로졌겠지만, 가까운 이의 죽음을 실시간으로 겪어본 이라면 생각이 다를 것이다. 당신 옆자리에 있던 할아버지는 처음 병원에 들어왔을 때 가족에게 대소변을 맡기는 상황이 수치스러워서 어찌할 줄 몰라 했다고 한다. 나중에 간병인이 케어하면서, 그리고 정신줄을 놓으면서 그 수치스러움을 조금씩 내려놓았다. 당신 또한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황임에도 의료진 앞에서 자신의 몸을 가리고 싶어서 손을 움찔거렸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을 타인에게 맡기는 순간부터 ‘수치’를 떠올리게 된다. 그 상황을 겪고 죽어야지만 ‘자연의 섭리’와 가까워진다는 말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 정도 상태가 오면 삶과 죽음은 습자지 한 장 차이일 뿐이다. 나에게는 자연의 섭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수치스럽게 죽음을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죽음 앞에 나아가는 자유 죽음이 좀더 존엄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