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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스타시아 Mar 09. 2021

차별과 다양성에 맞서는 아이들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아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던지고 사라졌는데, 그럼에도 내 삶은 이전과 똑같이 흘러간다. 평소에는 그들을 마음에 담아두지 못하고 살았으면서 그들이 사라진 이후에야 그 사실을 후회한다. 멍하니 있다 보면 내가 내 삶에 치여 사느라 남을 보듬지 못했다는 자책 같은 것들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그 자책을 벗어버리고 싶어서 여성의날을 앞두고 3일간 3.8킬로미터를 달렸다. 달린다고 뭐가 달라지나 싶으면서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이유로 또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어서, 친구들과 함께 기어이 신발끈을 동여매었다. 고립되었다고 느끼는 누군가에게 여기 함께하는 이들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우리가 ‘다민족’임을 믿는 사회에 살았다면 조금 달랐을까. ‘다문화’가 ‘한국인 외의 다른 문화’가 아니라 ‘한국인 비한국인을 따지지 않는 다양한 문화’를 뜻하고, ‘외국인노동자’가 아니라 그냥 ‘노동자’로 대우받는 세상, ‘국제결혼’이 아닌 그냥 ‘결혼’인 세상. ‘국사’가 아니라 ‘한국사’를 배우고, ‘국어’가 아니라 ‘한국어’를 배우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운다면 우리는 서로의 다양함을 좀더 유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순혈주의,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이 우리의 상상력을 축소시킨 게 아닌가.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는 일본인 엄마라는 ‘옐로’에 영국인 아빠라는 ‘화이트’를 반씩 나누어 받은 아들을 관찰한 엄마의 이야기다. 일본에서도 자신을 ‘다른 존재’로 바라보고, 백인 아이들 사이에서도 ‘동양인’으로 분류되는 아이는 스스로에게 ‘약간의 블루’가 있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멈추었다면 일반적인 책이었을 텐데, 온갖 차별과 폭력으로 가득한 ‘구 밑바닥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그 차별과 기꺼이 맞서 싸운다. 아들은 기어이 우울을 상징하던 ‘블루’를 미숙과 경험부족을 상징하는 ‘그린’으로 정정한다. 미숙과 부족한 경험을 기꺼이 채워나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쉽게 읽히는 이 책에는 노동자계급과 중산층계급, 백인과 비백인, 페미니즘, LGBTQ까지 언급된다. 아들은 이 모든 다양성 안에 살면서 스스로 성장하고 친구들까지 감화시킨다. 그의 성장기는 편견 많은 우리 세상과 비교되어 좀더 아름답게 비추어진다. 다름을 인정하고 모르는 것들을 배워나가는 10대의 유연함에 감동받았고, 차별당하는 아이를 도우며 “너는 내 친구니까”라고 말하는 아이의 편견 없는 말에 위로받았다.      


영국 사회 교육의 어려움과 문제점도 엿볼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 문제점들이 부러울 정도로 전반적으로 우리나라보다 교육 수준이 뛰어나다. ‘단정하지 말고 이런저런 방향으로 생각해보는 게 중요하다’고 교육하는 ‘시티즌십 에듀케이션’ 훈련을 10대에 받은 이들이라면 차별금지법에 반대하고 ‘너희가 어떻게 살든 상관 안 하는데 내 눈앞에 안 보였으면 좋겠어’ 같은 말은 쉽게 내뱉지 않을 것이다. 다양한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는 편견 없는 사회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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