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처음 간 날, 설문지 두 뭉치를 받았다. 하나는 왜 병원에 찾아왔는지, 지금의 가장 큰 고민과 힘듦이무엇인지 묻는 간단한 자료였고, 다른 하나는 성격과 성향 테스트였다. 내 차례를 기다리며 그 테스트지를 열심히 체크했다. 대부분 한 질문당 ‘매우 그렇다’, ‘그렇다’, ‘보통이다’, ‘아니다’, ‘매우 아니다’ 다섯 가지로 나뉘었는데, 종종 무엇을 선택해야 좋을지 모를 질문들이 나왔다. 상황에 따라 그렇고 아닐 때가 있는 법인데. 곰곰 생각하다가 ‘그렇다’와 ‘아니다’ 두 가지를 모두 체크했다. 덕분에 이중 체크 작성지는 전부 다시 작성하라는 수정 요청을 받았다. 다시 체크하며 ‘과연 이 테스트를 믿을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상담이 끝난 후 손목과 발목에 무언가를 차고 몸 상태 진단도 받았다. 맥박과 자율신경계 검사라고 했다. 이 막대기가 내 상태를 어떻게 진단하는 걸까. 궁금하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뭐, 필요하니까 체크하는 거겠지. 그저 얌전히 앉아 내 손과 발을 내주었다.
첫 날 내가 체크한 간단한 설문지를 살펴보던 의사는 건강해 보인다며 ‘병원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라고 진단했다. 성격테스트 세 번을 거치는 동안 진짜 자신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 스스로 괜찮은지 아닌지, 자기 이야기를 더 꺼내고 싶은지 확인해보라고 했다. ‘오고 싶으면 오고, 싫으면 안 와도 상관없다’고, 그럼에도 말동무가 필요하다면 도와주겠다는 의미로 알아들었다. 그 결과에 ‘그래도 정신상태는 건강한 듯해서 다행이다’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다음 주에 다시 만난 의사의 태도가 약간 달라졌다고 느꼈다. 그는 ‘내 검사지를 못 믿겠다’고 말했다. 내 성향 때문이다. 그는 내가 남 앞에서 흐트러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의연하려 노력하는 타입이라고 했다. 그러니 아무리 검사지에 솔직하게 답변한다고 해도 ‘지금의 나’가 아닌 ‘보이고 싶은 나’에 맞추어 답을 했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자율신경계 검사 결과 때문인 것 같았다. 두 개의 막대기에 눈에 띄게 고저가 있었는데, 우울과 나른함 의욕저하 등이 있을 때 그와 같이 불균형이 나타난다고 한다. 모니터 속 테스트 수치는 정상범위에서 살짝 비껴나 있었다. 그는 약을 먹을 정도의 상태로 보이지는 않지만 무력한 상태인 것 같다고 했다. 무기력을 방관하면 우울로 이어진다는 말을 어딘가에서 주워들은 적이 있다. 아니, 우울하면 무기력해지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좋은 신호 같지는 않다.
무기력은 나 또한 느끼고 있던 바다. 평일에는 회사를 출근하니 나름의 루틴이 있어서 괜찮은데, 주말만 되면 심하게 가라앉는다. 주말은 대체로 당신과 온전히 가득 채우던 시간이니까. 그 시간을 함께할 사람이 부재하니 자꾸만 바닥으로 침잠하는 것이다. 주말에 종일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바닥에 엎어져 있다 보니 하루 3시간쯤 사용하던 휴대전화 시간이 하루 7시간에 달하게 되었다. 책이라도 읽으면 다행인데, 집중력도 한껏 저하되어서 끝까지 읽어내리는 책이 몇 권 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저 휴대전화만 한껏 들여다본다. 아무 생각하지 않고 볼 수 있는 예능과 인터넷에 떠다니는 우스갯소리만 찾아 헤맨다. 대체 그게 뭐가 재미있다고. 그래도 계속 들여다본다. 그러면 하루가 빨리 가니까.
의사는 내게 의지할 데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의지하기보다는 타인을 이끄는 타입인데다가 책임감도 강하다 보니 스스로 짊어진 무게가 상당하다. 의사는 심지어 남편도 의지할 만한 상대는 아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의사가 누구에게도 기대고 싶지 않아 꼿꼿하게 서 있는 나를 묘사하는 이야기를 듣다가 스스로가 안쓰러워 눈물이 났다. 가만히 앉아 기꺼이 기댈 수 있을 만한 사람을 곱씹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떠올랐다고 해도 그에게 기댈 만큼 낯이 두껍지도 못하다.
의사는 추가 테스트를 권했다. 질문지만 500문항이었다. 이 문항을 다 풀면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숙제를 들고 조용히 병원 밖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