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사진 한 장이 있다. 손바닥만 한 고양이 네 마리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사진. 사진 속 녀석들이 너무 작고 작아서, 안으면 상처가 날까 싶어 손가락에 힘주기조차 힘들 것 같아 보인다. 눈도 못 뜬 그 녀석들을 누군가 남의 상점 앞에 박스째 버렸다고 한다. 나는 그 네 마리 가운데에서도 가장 작은 한 녀석에게 눈길이 갔다. 평소에도 아주 곱고 예쁜 품종 고양이보다는 어딘가 나사 한쪽이 빠진 것 같은 어벙한 스타일의 토종 고양이에 좀더 애정이 가는 나로서는 그 녀석의 멍한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팔자눈썹을 그리며 넋을 놓고 사진을 바라보는 내게 지인은 “둘째 생각 있으면 말해주세요”라고 넌지시 제안을 보냈다.
이후 집에 돌아갔는데도 그 사진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지인에게 카톡을 보내 “아까 그 고양이 사진 좀 보내주시겠어요?”라고 제안했다. 자꾸 보고 싶어서, 사진 보며 간직하고 싶어서. 실제로 조금만 마음의 여유가 생겨도 그 사진이 생각났고, 회사 동료들에게 “새끼고양이 보여줄까요?” 하며 사진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날도 아마 팔자눈썹을 그리며 “너무 예쁘죠!”라고 외쳤을 것이다.
나는 결심을 세우기까지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는 타입이다. 이리 굴려보고 저리 굴려보고 고민을 잠시 저 멀리 넣어놓았다가 시간 날 때 또 꺼내어 굴려본다.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면 얼마나 잘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그래,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기면 그때 결심한다. 그러다 보니 한번 결정하면 쉽게 번복하지 않는다. 그런 내가 둘째를 들일 걸심을 하라니. 상상하지 못했다. 결심을 미룰 이유는 너무 많았다. 리아가 떠난 지 1년도 안 된데다가 웅이 나이도 이제 중년을 지나 노년을 향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나는 새끼고양이 특유의 에너지를 감당할 여력이 되지 못한다. 내 체력은 회사생활로 이미 반쯤 소진될 정도로 나약하고, 웅이도 육묘를 감당하기에는 나이가 상당하다. 웅이가 느끼는 리아의 빈자리가 커 보이지만, 그것은 리아만이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고양이가 들어온다고 해서 채워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둘째 입양은 내 바람일 뿐 웅이가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게다가 둘째 입양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웅이의 수명이 단축된다면?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문득 이런 내 성향이 리아에게 상처로 남은 기억이 떠올랐다. 리아는 우리 집에 임시보호로 온 녀석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제대로 된 이름도 지어주지 않고, 구조자가 지어준 이름인 ‘리아’를 그대로 불렀다. 언젠간 내 곁을 떠날 녀석이니까, 굳이 이름을 따로 부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리아는 1년간 우리 집에 '임시'로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리아를 마음껏 예뻐해주지도 않았고, 실제로 예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정은 최소한만 주기. 너무 많이 사랑하지 말기. 내 마음 다치지 않고 싶어서 세운 원칙이었다. 그 덕에 내 마음은 지켜냈겠지만, 리아 마음은 어떠했을까. 너를 좀더 일찍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고민할 시간에 더 열심히 사랑해주었어야 했는데.
사진을 받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네 마리 가운데 하나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소식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어벙한 그 꼬맹이가 떠난 것인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은 세 마리를 찍은 사진을 받았고, 나도 모르게 가장 몸집이 작던 그 녀석의 뒤통수를 눈으로 쫓았다.
‘아, 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금방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찌되었든 한 생명이 떠났는데 무슨 안도를. 그리고 생각했다. 저 세 녀석 가운데 하나라도 내가 책임진다면 어떨까? 제 몫을 살아내게끔 내가 보조해주면 어떨까? 이번에는 리아 때처럼 1년이나 고민하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