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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스타시아 Oct 23. 2021

나를 지키며 일한다는 것

21.10.23.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 일명 ‘비보’라는 팟캐스트 애청자다. 김숙의 당당함을 사랑했고, 특히 송은이 같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지난주 심적으로 힘들었고, 자괴감이 컸다. 나는 내가 되고 싶던 어른이 아니었다. 계속 땅굴을 파다 보니 나중에는 ‘나 이제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거 아닌가’, ‘너무 일찍 복귀했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까지 도달했다. 내가 처한 상황을 해결해줄 사람은 곁에 없었고, 나는 끝없이 바닥으로 내려갔다. 혼자라는 생각, 동료가 없다는 생각이 나를 힘들게 했다. 그래서 퇴사한 그 친구가 그립기도 했다. 이제는 너무 멀리 왔지만, 서로의 신세를 하소연하며 의지하던 순간이 분명 있었으니까. 이럴 때 이환희가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분명 다정하면서도 정확한 조언을 건네어주었을 텐데.


고민하다가 K를 찾아가 내 힘든 상황을 설명하고 조언을 구했다. 그분은 성향이 나와 꽤 비슷하다. 쉬면 죄 짓는 것 같아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주말에 할 일이 없으면 과일을 사다가 잼이라도 만드는 사람. 그가 내게 쉬는 날에는 뭐하는지 물었다. ‘남편이 떠나고 나서는 주말에 자꾸만 누워 있게 된다. 그래서 침대를 없앴다. 일부러 외주 일을 받기도 하고 원고도 만진다’고 대답했더니 ‘앞으로는 주말마다 3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3시간 동안 가만히 있으라고요? 그건 제게 너무 어려운데요.”

“그냥 리모콘으로 채널이라도 돌려.”


스스로에게 여유공간이 없으니 남들에게도 박하게 군다는 조언이다. 여유를 남기고, 한계를 설정하라고 했다. 남편을 잃었다고 일을 더 한다니, 그런다고 그 슬픔이 줄어들 것 같냐는 뼈 때리는 말은 덤이었다. 한 가지 골칫거리를 생각하고 싶지 않아 다른 일을 만들면 또 다른 골칫거리만 하나 더 느는 셈이라며. 


맞는 말이다. 최근 내게 주어진 모든 일을 받아 안았다. 이 성향은 전 직장에서도 비슷했는데, 상사가 “누가 이거 맡을 사람?” 하고 물었을 때 침묵이 감돌면 늘 참지 못하고 “제가 할게요”라고 대답했다. 내 일이 얼마나 많든 상관없이 말이다. 덕분에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 역할까지 떠안았다. 그러고는 버거워서 힘들어하고 내게 일을 떠넘긴 상대를 원망했다. K는 말했다.


“앞으로는 한계를 설정해. 여기까지만 해주겠다. 네가 일을 안 해준다고 상대가 파멸할까 걱정하지 마. 상대도 파멸을 몇 번 겪어야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구나’를 안다니까? 지금은 너만 힘들지 상대는 네가 힘든 줄도 모를걸?”


사원이면 사원 역할만 하라고, 일이 안 돌아가면 그대로 망가지게 두라고. 그다음 수습하는 일은 이사진과 책임자가 하면 된다고. 그 냉철한 분석에 묘하게 위로받았다. 나, 그 일 다 받아안지 않아도 되는 거구나. 


K의 미션을 받은 첫 주말이다. 원래 토요일 오전에는 내내 집안을 대청소하는데, 오늘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텔레비전이 없어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릴 순 없어서 예능다큐를 봤다. 다큐플렉스 ‘은이네 회사.’ 송은이가 대표로 있는 비보의 역사를 훑는 예능형 다큐다. 1, 2편을 마치니 얼추 3시간을 채울 수 있었다. 


다큐를 보며 느낀 점은 ‘어쩌면 송은이를 롤모델로 삼은 게 내 문제였을까’ 싶었다는 것이다. 솔선수범하고, 모두를 존중하면서 존경받고, 사회와 조직에 무해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 노력하는 그를 나는 왜 따라하고 싶어 했을까. 나는 그런 그릇이 아닌데. 차이점이 있다면 송은이는 그 모든 일을 스스로 즐거워서 하고 있고, 나는 ‘왜 나만’을 외치며 억울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옆사람이나 동료를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을 보면 그 쪼그라든 영혼을 혼자서 불쌍해했다. 자신에게 좋은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 하겠다는 선언에 작은 경멸을 보내기도 했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런 사람은 적어도 자기 자신은 지켰잖아. 나는 남은커녕 나조차 지키지 못했다. 그 생각을 하면 자꾸만 입 안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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