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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스타시아 Nov 21. 2021

위로를 나누고 싶어서

2021.11.21

며칠 전에 지인이 사주를 봐주었다. 주변에 나를 치는 사람이 많고, 심지어 나조차 나를 치며 사는 팔자라더라. 스스로에게도 가혹하고, 남한테도 가혹한 타입이라고 한다. 그 말 들으며 “어머, 맞아. 맞아요!” 손뼉 치며 한순간에 빠져들었다. 내 주변 사람 가운데 누가 나한테 가장 나쁜가 곰곰 떠올려보면 선택지 가장 상위권에 내가 있더라. 내가 나한테 가장 나쁘다. 사주를 봐준 분이 앞으로는 말을 적게 하고 가만히 있으라고, 오지랖도 그만 부리라고, 그러면 장차 왕이 된댔다. 그래서 요즘에는 속으로 3초를 센 다음에 말하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저 왕이 되면 후기 올릴게요. 기대해주세요. ㅎ


11월 21일. 오늘은 환희 씨 1주기다. 시부모와 우리 엄마, 내 동생과 함께 모여 환희 씨를 보고 왔다. 길이 막혀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이미 오전에 환희 씨에게 많은 이들이 다녀간 것 같았다. 꽃 꼽는 자리에 새로 놓은 꽃들이 너무 많아서, 내 꽃은 도로 들고 왔다. 역시 인기쟁이 내 남편. 엄마가 꽃꽂이 실력을 발휘해 각자 있던 꽃들을 하나의 다발로 뭉쳐주었는데, 덕분에 주변 꽃들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풍성해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시엄마는 더 작아 보였다. 껴안았더니 한줌이더라. 이번에도 시엄마는 내가 아는 사실과 다른, 시엄마가 상상한 환희 씨를 이야기했는데, 정정해주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했더니 들을 만했다. 신기한 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시엄마가 갑자기 내 칭찬을 와르르 쏟아냈다는 점이다.


“너는 어쩜 그렇게 강하니. 100일 동안 글을 써서 그걸 책으로 만들어내니. 환희는 어쩜 이렇게 똑똑한 마누라를 얻었을까.”


3초를 기다렸더니 정말 왕이 되었다.


퇴고 과정에서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 저자인 산만언니 작가께 그때 일을 다시 겪는  같아 퇴고를 견디기가 힘들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분은 단호하게 “쓰지 말라”, “그만두라 조언했다. 불행을 글로 쓰는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인데, 본인은 26년이나 걸린  일을 고작  개월 전에 겪어놓고 책으로 내는  말이 되냐고. 이게 돈이 되기를 하냐고, 명예가 되기를 하냐고.  걱정 앞에 “환희  1주기에 맞추어야 해서  돼요라고 대답했다.


아직 마음이 아물지 않았는데 서둘러 책으로 정리한 이유는 1주기에 맞추어 환희 씨와 환희 씨를 아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내가 힘든 것보다 환희 씨 1주기에 맞추어 책을 내는 게 더 중요했다. 나는 환희라는 배우자를 잃었지만 누군가는 동료를, 누군가는 친구를, 누군가는 가족을 잃은 거니까. 환희를 잃은 모두를 위로하고 싶었다. 이것도 오지랖이려나.


책을 받자마자 다시 한 번 읽어봤다. 사주를 듣고 나서인지, 아니면 시간 흐름에 따라 요동치던 마음이 어느 정도 잦아들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입을 다물었어야 하는 순간’들이 눈에 보이더라. ‘이 말은 시엄마에게/우리 엄마에게/시아빠에게/환희 씨 앞에서 하지 말걸’ 싶은 후회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당신 1주기에 맞추어 책 출간되는 모습까지 보고 나니, 심하게 말하면 생의 과업을 다 마친 듯한 기분이 든다. 이제는 할 일이 없다 생각했는데, 한 가지 남았더라. 가혹했던 스스로에게 조금 관대해지기. 이제 남은 과업 같은 거 없으니까, 산만언니 작가님 말처럼 하기 싫으면 때려치워버리고 드러누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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