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에게> 시나리오
H.O.T.와 젝스키스가 대세이던 시대에 내 친구는 서태지를 좋아했다. 김원준을 좋아하던 나와 서태지를 아끼던 그 아이는 소수파라는 공통점 덕분에 금세 친해졌다.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일까. 붙어 있을수록 미묘한 감정이 일어 그 아이를 마주보기 어려워지곤 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여자 중학교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런 마음을 숨기지 않는 문화가 즐비했다.
그 대세에 호응하며 가볍게라도 친구에게 마음을 표현해도 괜찮았을 법한데, 이상하게도 내게는 그게 어려웠다. 내 마음이 호기심이나 장난이 아닐까봐, H.O.T. 시대에 김원준을 좋아하는 것만 해도 힘든데 남자가 아닌 여자를 좋아한다면, 내가 영원히 소수파라면 어쩌지 싶어 두려웠다.
이런 나와 달리 친구는 감정 표현에 적극적이었다. 유난히 춤을 잘 추던 1년 선배가 있었는데, 친구는 그 언니가 서태지와 비슷하다며 이내 서태지 언니에게 팬레터도 쓰고, 간식도 사다 바치기 시작했다.
야, 그 언니가 서태지랑 뭐가 비슷해. 얼굴은 허여멀건 하고 겉멋만 잔뜩 들었어.
내 비난에도 그 언니 편만 들며 나중에는 그 언니가 지원한 모 여고를 가겠다는 친구한테 자꾸만 화가 났다.
당시에 나에게도 편지나 간식 등을 들고 찾아오는 친구들이 있었다. 매일 내 앞에서 말도 잘 못 걸던 옆반 친구가 하루는 하굣길이던 나를 막아선 뒤에 ‘키스해주면 이거 줄게’라는 장난을 걸었다.
서태지 좋아하는 친구와 같이 있던 차였는데, 친구 앞에서 괜히 당황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서 아니면 내 심정을 너도 좀 당해봐라 싶어서 호기로운 척 그 말을 받아주고 무언가를 받았다. 생각해보면 키스라기보다는 입술박치기에 가까웠는데, 저질러놓고도 당황스러워서 물건만 받고 얼른 자리를 피했다.
그게 내 첫키스였다.
친구는 정말 서태지 언니를 따라 근처 여고를 지원했고, 나는 여자 사이에 있다가 정말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될까봐 근처 남녀공학을 지원했다. 이후 친구와는 점차 연락이 뜸해지다가 이내 그런 마음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희미해졌다.
종종 퀴어 관련 책을 읽으면 내 엉뚱한 첫키스와, 차마 고백하지 못한 마음과 서태지 언니를 따라 여고에 간 그 친구가 교차해 떠올랐다.
내가 좀더 용기 있었다면, 편견 없는 사람이었다면 나를 좋아하는 옆반 아이의 마음을 이용하지도 않고, 내가 좋아하는 친구를 그냥 떠나보내지도 않았을 텐데.
주말에 <윤희에게> 영화를 다시 보고 단행본으로 출간된 시나리오를 읽었다.
‘나도 네 꿈을 꿔’라는 윤희의 고백은 타인이 원하는 삶에 갇혀 메말라가던 그가 그 거짓을 깨고 나오겠다는 선언이기에 아름답다. 사랑이 좌절된 윤희의 삶은 줄곧 메말라왔지만 그럼에도 그가 결코 부러지지 않았던 까닭은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로 결심한 이 순간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남이 허락하는 사랑만 사랑이라면 우리 삶은 점점 더 납작해졌을 것이다. 그 어떤 상상력도 허락되지 않는 세상은, 다수의 목소리만 들리는 세상은 결국 좌절하고 만다.
중학교 때 나를 만날 수 있다면 타인에게 허락받아야 하는 마음은 없다고, 지금 느끼는 이 감정도 너의 일부라고 그러니 용기를 내라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