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나스타시아 Apr 10. 2020

나는 정말 이 죽음을 알지 못하나

은유,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아빠는 무뚝뚝한 성격에다가 생전 남 앞에서 굽신거릴 줄 모르고 본인 소신에 맞추어 사는, 이른바 ‘가오’로 무장된 사람이었다. 남들이 본인을 ‘사장님’이라고 부를 때 가장 좋아하던 그는, 연이은 사업 실패로 인해 하루아침에 ‘노가다판 아저씨’가 되었다. ‘사장님’에서 ‘아저씨’로의 추락을 아빠는 상당히 수치스럽게 여겼는데, 그래서인지 가족 누구에게도 본인이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말하기를 꺼려했다. 한번쯤 내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말하고, 같이 일하는 이들을 ‘나쁜 새끼들’이라고 말한 게 전부였다. 사무실 안에 있는 믹스커피를 타먹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였다. 얼핏 듣고 그게 얼마나 한다고 아빠에게 아끼나 했는데, 가격 문제라기보다는 탕비실을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이 정규직인 본인들과 비정규직인 아빠를 가르는 요소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 남의 인정으로 사는 사람인데,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그에게 얼마나 큰 수치로 작용하는지 나는 알았다.


아빠는 공사현장에서 작업반장으로 오래도록 근무했다. 말이 ‘반장’이지, 일용직을 관리하는 비정규직쯤 되는 자리여서, 해당 공사현장이 완공되면 새 일을 잡을 때까지 몇 개월 동안 백수로 지내야 하는 신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지킬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상대가 바라는 것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것. 아빠가 새벽 4시에 일어나 회사를 나가고, 점심시간마저 반납하고 일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아빠는 점심시간에 일하다가 돌아가셨다. 당시 서 있던 바닥 판의 자리가 풀려서, 그 자리에서 추락했다. 아빠는 혼자 일하고 있었고, 현장에 안전망은 없었다. 나중에 아빠가 돌아가신 김포의 초등학교 증축 현장에 가보았다. 5층이라는 높이가 내 생각보다 너무 높아서, 감히 위를 쳐다볼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귀로 들은 “5층에서 떨어지시는 바람에”라는 말은, 그 정도 높이에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말은 내게 비현실적으로 들렸는데, 눈으로 보니 바로 이해가 갔다. 아, 저 높이에서는 사는 게 기적이었겠구나. 


공사 현장에서 돌아가신 게 명백했기에, 바로 아빠가 일하던 회사와 협상이 들어갔다. 상복을 입고 난감한 표정의 회사 직원과 몇 번 대면했다. 그는 아빠의 바로 윗사람으로, 매일 한솥밥을 먹던 사이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아빠가 죽을 수밖에 없던 이유를 설명받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안전 그물망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작업 막바지라 그 안전망들을 전부 걷어들였다고 했다. 초등학교 개학 전에 공사를 끝내려고 서두르던 참이었는데, 사망 사고가 생겨서 모든 것이 올스톱이라고, 빨리 우리가 협의해줬으면 좋겠다며 난감해했다. 


그가 보여준 프린트한 사진들에는 정말 초록 안전망이 네 면에 빼곡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그 그물망들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왜 공사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 그물망들을 걷은 것일까. 그에게 묻고 싶었지만, 묻는다고 아빠가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또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갑자기 아빠를 잃은 우리는 분노에 차 있었으나, 동시에 회사의 대표로 내 앞에 선 그가 얼마나 난감할지 느낄 수 있었다. 어제까지 같이 잠을 자던 동료를 잃었는데, 지금은 그 동료의 가족들 앞에서 돈 이야기를 해야 하다니. 아빠와의 죽음과 별개로 그를 일하는 동료 시민으로서 측은하게 여겼다. 물론 당시에는 측은한 감정보다 멱살 잡고 싶은 심정이 더 컸지만.


아빠의 상사는 우리에게 산재에 대해 설명하며, 얼마 전 30대에 어린 자식이 있는 남성이 산재로 사망해 얼마를 받았는데, 아빠는 50대 후반임에도 이만큼 나오니 자기네들이 우리를 얼마나 잘 대우해주는 것인지 누차 설명했다. 나이가 어리고 부양가족이 많을수록 더 많은 보상을 받는다. 산재로 보상받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고 또 그 안에서도 나이와 성별에 따라 서열화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장례를 마치고, 문득 궁금해져서 구글 창에 아빠가 돌아가신 현장을 검색해보았다. 안전망 하나만 제대로 설치되어 있어도 살 목숨이었으니까, 지역 신문에라도 이런 내용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단신 한 줄 없었다. 아빠와 같은 죽음이 얼마나 많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노동현장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아이들의 죽음을 기록한 은유 작가의 책 제목은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이다. 제목에 쓴 ‘알지 못하는’이라는 수식어는 과연 맞는 말일까. 나는 이 죽음들을 정말 알지 못하나. 


아빠가 돌아가신 해에 태안 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인 고 김용균 씨의 죽음을 접했다. 그의 죽음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던 이유는 아빠의 죽음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아빠가 돌아가신 해와 같은 해였기도 했고, 아빠 역시 최소한의 안전장치만 있었어도, 2인 1조로 일해서 아빠가 추락하자마자 누군가 조치를 취해주었어도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시지 않았을 테니까. 기계에 깔려 죽은 고 이민호 씨의 아버지 이상영 씨는 “해를 보는 게 미안해서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고 말한다. 착하고 바르게 살라는 충고들이 아이를 죽인 것 같다고 자책한다.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한다. 나도 아빠와 함께했던, 어쩌면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수많은 장면을 곱씹고 또 곱씹었으니까. 사람은 직접 겪기 전에는 알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은 존재 같다. 


아이들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고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너무나도 많은 죽음이 외주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안전한 만큼 누군가는 위험을 부담하고 있다. 사회의 어둡고 위험한 부분이 세상에 가장 취약한 지점을 향하고 있음을 책은 보여준다.


만 18세에 직장 내 괴롭힘으로 생을 마감한 고 김동준 씨 사건을 산재로 이끌어낸 노무사 김기배 씨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빈틈, 채워야 할 빈틈이 있다는 거죠. 내가 나한테도 빈틈이 있다는 걸 모를 정도로 우리에게 빈틈이 많은 거예요.” 사회적 타살이 허망하게 사라지지 않으려면 이 슬픔이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빈틈을 채워주는 단추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의 죽음이 ‘알지 못하는’이라는 수식어로 끝나면 안 될 테다. 


아빠의 죽음을, 책 속 아이들의 목소리를 기억하기 위해 김용균 재단을 후원하기로 했다. 책을 열기 전에는 ‘알지 못하는’ 사이였지만, 이 책을 관통한 뒤에는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하는 사이가 아니게 되었으니까. 죽은 이가 다시 돌아올 수는 없지만 똑같은 죽음을 막을 수는 있다는 믿음으로 함께하기로 한다.


김용균재단 후원: yongkyun.nodong.org






매거진의 이전글 내 엉뚱한 첫키스에 대한 단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