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구멍을 조금씩 메우는 시간
친절과 예의는 사회생활에 필요 덕목으로 여겨진다. 세상이 내게 바라는 그 미덕들을 최대한 열심히 지켜왔다. 낯선 이에게 친절을 담은 미소를 건네고, 몸을 아래로 낮추고, 합장한 채 고개를 숙이며 “미안합니다”라는 말에 최대한 진심을 담는 것은 기본이다. 조금만 실수해도, 심지어 내 잘못이나 고의가 아니어도 일단 사과해야 마음이 편했다. 혹시 상대가 불편해하거나 기분 나쁠 만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치는 연막이다.
이 태도가 삶에서 마이너스로 작용한 적은 드물었다. 일반적으로 친절한 이에게는 함부로 굴지 않기 때문이다. 무해해 보이는 얼굴로 죄송함을 말하는 이에게 날 선 감정을 드러내 스스로 얕은 인성을 증명하려는 이가 몇이나 되겠나.
문제는 옹송그리는 태도가 축구에서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사실이다. 초보인 나 같은 이는 실수를 사과하느라 하루 해가 다 간다. 패스 미스로 빌드업Build-up(상대의 압박을 피하고 공격으로 나아가기 위한 일련의 움직임 및 패스 워크)을 시작부터 망치고, 느린 패스로 역습당할 빌미를 제공하고, 굼뜬 동작으로 우리 팀 공격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나는 말 그대로 팀의 구멍이었다. 나 때문에 생기는 결함들을 지켜보기가 힘들고 함께하는 이들에게 민망해 입에 “미안해”를 달고 다녔다. 언젠가 영은 내게 “저 언니는 내가 뭐라 하려고 쳐다보면 이미 고개 숙이고 민망한 미소 짓고 있어서 화를 못 내겠다? 너무 예의가 바라서 탈이야”라고 했는데, 살면서 처음으로 ‘예의바르다’가 칭찬이 아니게 들렸다. 왜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음에도 나는 스스로를 ‘미안해야만 하는 사람’으로 만드는가.
한번은 경기 중에 내 패스 미스가 공을 라인 밖으로 내보냈다. “악! 미안!” 소리치며 두 손 모아 사과하는 나를 뒤에서 지켜보던 골키퍼 요다가 큰 소리로 한마디 했다.
“지은 언니! 미안해할 시간에 한 발 더 뛰세요!”
상대는 수없이 우리 골문을 두드리고, 우리는 공 걷어내느라 정신없는데 사과할 시간 아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몸을 놀리라는 주문이었다. 그러게. 치열한 싸움터 한가운데에서 두 손 모아가며 “미안해”를 건넬 시간이 어디 있나. 방금 한 실수가 문제라면 빨리 달려가 만회하면 된다. 결자해지. 문제를 유발한 사람이 풀어내는 것이다. 못 풀면 뭐, 하는 수 없고. 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니 옆자리 친구가 대신 메꿔주겠지. 아니면 빌드업부터 다시 시작하거나.
미안해하지 말라는 건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밥에 말아먹은 듯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라는 뜻이 아니다(배려 없는 플레이로 파울을 만들었다면 분명 정중하게 사과해야 한다. 우리는 스포츠하는 거지, 패싸움하는 게 아니니까). 이는 좀더 스스로의 실수에 관대해지고 의연하라는 의미다. 인간은 시행착오로 성장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아기는 혼자 걸어보려다가 넘어졌다고 해서 양육자에게 사과하지 않는다. 한번 빽 울고 난 다음에 여력이 될 때 다시 시도할 뿐이다. 그렇게 수백, 수천 번 넘어진 끝에 그 어떤 지지대 없이 두 발로 우뚝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미안해 버리기 연습’에 돌입했다. 그러려면 자신감 회복이 우선이었다. 수업만 가면 잔뜩 어깨를 움츠리던 나는 이때부터 깊은 심호흡과 함께 “할 수 있다”를 열 번씩 복창한 후에 필드에 들어섰다. 또 연습하는 두 시간 동안 ‘미안’을 세 번 이상 입에 올리지 않겠다고 정해놓았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훈련 시작 10분도 안 되어 ‘미안해’ 카드를 다 써버리는 바람에 나중에는 실수해놓고도 건넬 말이 없어서 양손으로 입을 막은 채 “으, 으으”거렸다. 영이 나를 봤다면 “저 언니 또 왜 저래” 했을 텐데 다행히 아무도 눈치를 못 챘던 것 같다.
물론 한번 습관으로 굳어버린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여전히 “미안”이 입안에서 맴돌고, 지금도 종종 친구들을 향해 두 손 모아 합장한다. 달라진 게 있다면 더는 미안하다는 말 뒤로 숨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막 걸음마를 뗀 초보이고, 지금은 수많은 실수를 겪는 시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안해’만 연이어 남발하다가 실수할 기회들을 차츰 놓쳐버려야겠는가. 자꾸만 넘어지고, 빨리 잊고, 몸을 놀려 다시 만회하는 그 ‘우당탕탕 시간’을 온몸으로 겪어야 다음 단계로 돌입할 텐데. 그러니 더 많이 실수하고, 자꾸만 바닥을 뒹굴고, 발을 헛디디면서도 조금씩 나아가기로 했다. 구멍인 스스로에게 좌절할 게 아니라 내 구멍을 천천히 메꿀 것이다. 조금씩 두 발로 서는 게 익숙해지고 이내 걷고 마침내 달리는 나를 기대하며 말이다. 이제 미안함을 버리고, 그 자리를 호기로움으로 채울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