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으며 동료들과 사회 현상에 대해 토론하던 중이었다. 군대는 모병제여야 하는가, 징병제여야 하는가. 치열한 대화 끝에 누군가가 무심히 이 말을 툭 뱉었다.
“결국은 다 돈 때문이에요. 돈 있으면 이렇게 대우 안 하겠지.”
그렇다. 나라살림이나 인생이나, 이 세상 수많은 불합리와 어둠은 결국 돈 때문에 벌어진다. 그때 돈만 있었어도 보다 나은 선택을 했을 테고, 돈만 있었어도 내가 그 억울한 사태를 겪지 않았을 테고, 또 돈만 있었어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나는 더 납작해진다. 그러니까 나는 그 종이 쪼가리가 없어서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다는 것인가? 그건 너무 처량하잖아. ‘내 삶의 줄기를 이루는 큰 키워드 중에 하나가 돈인 것 같다’고 마음상담 선생에게 고백했더니 그가 대답했다. “돈은 아니고요, 지은 씨의 가족에 역동을 일으키는 가장 큰 요소는 가난 같아요.”
돈과 가난이 같은 맥락 아닌가? 단어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돈은 가난보단 가치 중립적인 단어 같다. 엄마도 나도 ‘돈’에 대해 말하지만 ‘사는 데 필요한 정도’가 확연하게 차이 난다. 엄마는 ‘남들이 무시하지 않을 정도의 떵떵거림’을 바라고, 나는 ‘그냥 나 하나 먹고살 만큼의 돈’만 있어도 충분할 것 같다. 서로 바라는 정도는 달라도 둘 모두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는 동일하다. 가난. 그래, 난 가난을 무서워하는 거구나. 그리도 엄마도, 내 동생도 같은 무서움을 느끼고 있구나.
더불어 가난은 내게 또 다른 키워드를 던졌다. 바로 ‘쓸모’였다. 난 내 존재 가치를 자꾸만 쓸모에서 찾았다. 사실 많은 사람이 행복을 바깥에서 찾고 상대에게 의존한다. 그런데 그 의존에는 '사랑'이 주가 된다. 반면에 난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 같진 않다. 남들은 사랑받으면 가치 있다고 여기는지 모르지만, 나는 쓸모 있을 때만 가치 있다고 여겼다. 쓸모가 없으면 버려질 테고, 버려지면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결국 가난해질 거야. 이 마음의 흐름이 불안감을 키워 울면서도 일하고 사랑했다. 부탁받은 것을 응해주기 힘들어도 ‘내가 해주지 않는다면...’ 생각하며 잠을 줄여서라도 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부서지는 내 마음은 들여다보지도 못한 채 다른 사람의 둑을 쌓아주느라 아등바등했다.
나는 나의 가치를 자꾸만 내 밖에서, 남들이 주는 평판 안에서 찾았다. 이러면 스스로가 불행해진다. 쓸모도, 가난도 상대가 평가하는 기준에 맞추는 것이니 내가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는 것들 아닌가. 그런데 그 기준을 어떻게든 붙잡으려 했던 것 같다. 내가 세운 기준이 아니니 결국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나만의 기준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아직은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가난은 아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