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하며
세상을 시니컬하게 살아갈 때는 전 해 12월 31일이나 새해 1월 1일이나, 생일 전날이나 당일이나, 스물아홉이나 서른이나 구분에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 살 더 먹는다며 아쉬워하고 새해라며 갑자기 헬스장을 등록하고 다이어트니 자기계발이니 하며 이런저런 계획을 짜는 사람을 신기해했다. 삶은 하루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매일이 성실하게 이어지는 건데 왜 자꾸 이전 삶을 다 버리고 새로 시작이래.
‘망했다’는 감각을 경험해본 적 있는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1월 1일, 생일, 아홉수의 마지막 같은 것들은 일종의 리셋 버튼이다. 망했다는 기분, ‘잃어버린 00년’ 같은 기억, 끝없이 넘어지고 실패한 경험 같은 것들은 이전 세계에 놓아두고, 제로포인트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일종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6년 1월 1일이 고맙다.
올해 초 심한 번아웃을 겪었다. 삶에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쓸모’인 사람이라, ‘넌 쓸모없어’라는 반응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사장은 연봉 협상 때 “네가 회사에 끼친 손해가 마이너스 1억이다” 같은 말들을 쏟아냈다. 그해 매출 목표를 달성했지만 나 때문에 손해가 막심해서 은행에서 대출 5,000만 원을 빌렸다고 했다. 내가 대체 뭘 했다고? 사람을 싼값에 부리기 위한 멘탈 흔들기인 줄 알면서도 그 말들에 계속 마음을 베였다. 그건 나 또한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번은 마케팅 팀장이 내게 온갖 모욕을 주었다. 그 상황에 그를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그때 나는 죽음을 생각했다. 내가 죽으면 이 사람은 내 장례식에 올까? 누군가 내게 ‘지은 씨는 여기 있는 게 행복하지 않아 보인다’고 했다. 사실이었다. 퇴사하자마자 내게 모욕을 주었던 중년 남성의 모든 SNS를 차단했다. ‘팔로우 끊기’ 버튼 하나면 내 인생에서 점도 안 될 사람이었다. 그게 우스우면서도 슬펐다.
마침표의 또 한 가지 좋은 점은 망한 인생 속에서도 ‘그래도 이거 하나는 잘 견뎠네’라며 스스로를 칭찬해줄 요소 한두 개쯤은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비록 그곳에서 꽤 불행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준루의 점심 메뉴를 공유해주고 나와 함께하던 시간들이 그립다고 말해주는 동료들이 남았다.
터널이 끝없이 이어질 때는 내가 너무 못나 보이고 아무도 나를 괜찮게 여기지 않을 것 같고, 못하는 것, 후회스러운 점들만 가득 보였는데, 복기해보니 ‘생각보다 완전 망한 건 아니었구나. 그래도 서까래는 남았네.’ ‘밑바닥을 없애버리는 경험인 줄 알았는데 새로운 집을 짓기 위한 터전 다지기였을 수도 있겠구나’ 같은 깨달음들이 남았다. 새해를 앞둔 덕에 뒤를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끝맺음은 스스로에게 새로운 기회를 부여하는 행위였다.
이제 나는 새해를 새해답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 25년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견디고 26년이라는 다른 세계로 갈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내년의 나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나와 조금 더 친해졌으면 한다. 누구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 때가 온다 해도 나만큼은 내 편이라는 걸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일은 일출을 보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