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1.03
작년에 얻은 성과 중에 하나라면 지금껏 나를 밀어온 감정에 우울뿐 아니라 불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경쟁이나 다툼이 일어날 만한 상황을 피하고, 일에서든 생활에서든 지나치게 완벽해지려 애쓰던 것들은 모두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행동이었다.
불안이 분명 나를 지금의 나보다 한 단계 고양시켜준 것은 사실이다. ‘나의 가장 큰 경쟁상대는 어제의 나’라는 생각에 전날보다 나아질 점을 찾아 헤맸다. 단점도 실수도 많은 사람이라 나아질 만한 점은 매일 보였다. 만약 어제보다 나아진 게 없다면 싱크대라도 닦고, 의류수거함에 가져다놓을 만한 낡은 옷이나 바닥에 떨어진 휴지라도 찾아 버렸다.
이는 자기최면의 일종이었다. 넌 어제보다 나아, 어제보다 쓸모 있어. 이 주술은 타인들에게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고, 사회생활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그러니 자꾸만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남들이라면 70~80 정도 에너지를 쏟을 일들에 100을 넘어 120퍼센트까지 노력하고 뿌듯해했다. 그게 나를 소진시키는 줄도 모르고.
이런 점들을 하나둘 깨쳐나갈수록 나는 불안을, 그리고 불안한 나를 원망했다. 이대로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만족할 수는 없는 건가? 왜 더 잘하기 위해 자꾸 애쓰는가? 그러고 쓸모 없는 사람으로 여겨질까 봐 다시 불안해하는가. 이와 같은 하소연을 들은 의사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그렇게 행동한 것들이 당시의 지은 씨를 지켜주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 모든 불안은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였던 것이다.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기 위한 노력. 분명 그 노력들이 나에게 영광과 성과를 가져다준 적도 있었는데.
우울이 나를 바닥으로 밀어뜨리는 추락 같은 거였다면, 불안은 바닥의 존재 자체를 흔드는 지진과 같았다. 평소에는 나를 튼튼하게 받쳐주는 기반이었지만 불안에 잠식당할 때는 나의 근간을 흔들고, 삶을 위협하는 쓰나미마저 가져다주었다. 지진의 근원지를 몰랐던 나는 계속 스스로를 푸시하며 ‘왜 전처럼 안 될까’만 되뇌었던 것 같다.
그전에는 불안과 우울을 흰색 와이셔츠에 묻은 고추기름으로 생각했다. 지워야 하는데, 그래야 내 옷이 깔끔해지는데 잘 안 지워져. 하지만 삶에 슬픔이 사라질 수 없듯이 불안과 우울도 마찬가지다. 어떻게든 내 안에 자국을 남긴다. 근데 나는 온갖 세제를 써보고 락스에 담가보며 그 자국을 없애는 데 집중했다. 없어지지 않았음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각종 외투들로 덧입혔다. 그럴수록 자국은 더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작년에 불안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면 올해는 그와 공존하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 만화 <100미터>에서 고미야는 선배 달리기 선수에게 ‘불안에 대처하는 법’에 대해 묻는다. 전에 부상당한 왼발이 걱정되어서 최고 속도로 달릴 때면 자신도 모르게 힘을 빼게 된다고. 그 선배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불안은 대처할 대상이 아니다 인생은 패배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곳에 삶의 묘미가 있다 공포는 불쾌한 게 아니다 안전은 유쾌한 게 아니다 불안은 너 자신이 널 시험할 때의 감정이다.“
지금까지는 불안을 없애는 법에 몰두해왔다. 그래야만 했던 내 삶의 역사들이 있겠지만 이제 그것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이상 조금은 달라지고 싶다. 삶에 패배와 불안이 기본 조건임을 이해한다면 내 기반 또한 조금 더 단단해지지 않을까. 그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