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의 가치
남자 연예인이 삼삼오오 모여 지방 어딘가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예능 ‘1박 2일’에 시그니처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강호동 씨의 얼굴을 카메라가 클로즈업하면 그가 몸을 크게 부풀리고 온갖 손동작을 동원하며 큰소리로 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뱉는다.
“나만 아니면 돼.”
한때 즐겨 본 예능 ‘무한도전’에서도 “무한 이기주의”라는 문구가 자막으로 등장하곤 했다. 벌칙 게임에서 벌을 받는 마지막 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서로 안간힘을 쓸 때마다 언급된다. 텔레비전을 보며 함박웃음 짓고 있다가도, 그 자막만 등장하면 멈칫했다. 정말 나만 아니면 누가 걸려도 괜찮은가.
현실의 내가 벌칙을 겨우 피하는 쪽이었다면 그 문장 앞에서 박장대소할 수 있었을까. 나는 주로 벌칙을 받는 쪽이었다. 내 주변에는 온갖 잔망을 떨며 벌칙에 걸린 나를 희롱하는 이는 없었지만, 그 벌칙을 대신 맞아주는 이도 없었다.
오래 몸담았던 모 회사에서는 직원을 평가하는 절대기준을 ‘매출’로 잡았다. ‘베스트셀러’와 동떨어진 분야의 편집자는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없었다. 내가 속한 팀은 ‘깔아주는 애들’이었다. “너희 팀이 매출 좀더 내서 우리 팀 목표매출 좀 가져가라”는 말을 수시로 들었다. 분야의 한계를 말하면 분야를 바꾸라고 했다. 회사를 좋아했기에, 회사가 원하는 대로 나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결국 맞지도 않는 옷에 몸을 욱여넣은 꼴이 되었고, 나는 점점 슬퍼졌다. ‘난 잘하는 게 따로 있는데. 더 잘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이 말을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내가 받은 벌칙이니까. 이건 복불복 게임이니까. 천하의 강호동 씨도 담당 피디가 제안하는 게임 규칙을 바꾸지는 못하는데, 매출 평가 C를 받은 내가 도대체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팀 안에서는 상대평가가 이루어졌다. 팀 성적이 B라면, 개인 평균이 B여야 했다. C를 받으면 내가 ‘그저 그런 존재’라는 사실에 좌절했고, A를 받으면 옆자리 동료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어느 쪽도 기쁘지 않았다. 나는 ‘나만 아니면 돼’를 외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 그 복불복 게임에서 하차했다.
당시에는 ‘그래, 어떤 시련이든 내게 주어지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회사 밖 동료들도 모두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중이었으니까. 나처럼 A, B, C 등급을 노골적으로 나누어 받지는 않지만, 다들 입사동기, 옆자리 팀, 타 부서, 타 출판사와 꾸준히 비교당했다. ‘쟤들은 저렇게 하는데 너희는 왜 못 해?’ 나만 받는 줄 알았던 벌칙을, 내 또래 모두가 받고 있었다.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왜 꼭 누군가가 벌칙을 받아야 하는가. 복불복 게임을 거부한다고 선언하면 안 되는가.
누군가는 출판의 미래를 걱정하고, 출판을 다른 업계와 비교하며 비교와 경쟁의 정당성을 외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작은 사람이다. 출판의 거대한 미래보다 우리의 작은 미래가 더 소중하다고, 그저 나를 대신해 C를 받은 누군가에게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 일은 결코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럼에도 ‘출판의 미래’를 찾는다면, ‘같이’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싶다. 경쟁과 줄 세우기로 일등과 꼴지를 구분하는 일은 학창시절 경험으로 충분하다. 책의 중요성은 다양성이고, 그 다양성은 개성이 다른 우리가 서로 모여 만들어야 비로소 드러난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책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말보다, 작더라도 조금씩 함께 가자는 말로 서로를 보듬어주었으면 한다. 혹시 누군가가 ‘너희 가운데 하나는 이 까나리액젓을 마셔야 해’라고 말한다면 모두 사이좋게 한 모금씩 나누어 마시는 것이다. 비위가 좋은 나는 당신보다 두 모금쯤 더 들이켤 수도 있겠지. 그러나 누군가가 이 벌칙을 독박 쓰게끔 놔두고 싶지는 않다. 나는 당신의 불행 앞에서 신명나게 춤추는 사람이기보다 기꺼이 함께 우는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