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6.
‘남편’과 ‘아내’는 우리 관계를 표현하기에 너무 좁다. 내 남편이 그라서 다행이었지만 우리는 두 손 꼭 맞잡고 ‘생활동반자법 통과되면 이혼하자’ 약속했다. 우리는 서로의 남편과 아내가 아닌 온전히 평등한 동반자이길 바랐다. 그러니 삶의 동료, 반려자 등이 좀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친구로 지내다가 점차 친밀해졌다. 동갑인데다가 정당, 사상, 직업, 종교까지 일치한 덕에 금세 가까워졌다. 당시에만 해도 그를 이성으로 보지 않았다. 종종 속으로 ‘아, 제발 나 좋아하지 마라, 고백하지 마!’라고 외쳤다. 이토록 잘 맞는 친구를 고작 연애따위로 잃고 싶지 않았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연애’는 피 터지도록 싸우고 밀고 당기는 관계 속에서 내 몫을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만큼은 감정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연애 상대보다 마음 잘 통하는 편한 친구로 평생 가지고 가고 싶었다. 게다가 사귀다가 헤어지기라도 하면 다시는 함께할 수 없으니까. 물론 당시의 내 생각은 틀렸다. 남들과는 수 년을 밀고 당겨야 겨우 타협되던 것들이 그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맞더라고.
우리가 잘 맞는 짝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일반적인 성 역할에서 벗어나 있었음에도 이를 이상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 고정관념에 따르면 프로포즈는 남자가 하고 여자는 그 프로포즈를 받으며 눈물 흘려야겠지만, 우리는 반대였다. 연애는 그가 먼저 손 내밀었으나 결혼은 내 쪽에서 제안했다. 이토록 잘 맞는 그를 연애하다가 잃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연애 3개월 만에 결혼하자고 했다. 내 프로포즈에 그는 울었다. 그는 이런 전복을 자랑스러워했다.
결혼생활도 탈가부장적이었다. 환희 씨가 2월 4일에 태어났고 나는 12월 29일에 태어났으므로 내가 40일쯤 연상이다. 나는 종종 그에게 ‘누님’ 행세를 했다. 집안에 공구를 사용해야 할 일, 조립이 필요한 일들이 생기면 환희 씨는 나를 불렀다. 그러면 내가 “누님이 해줄게, 누님만 믿어”라고 말하며 그 일들을 처리해주었다. 그는 “그 정도는 나도 할 줄 알아”라며 자존심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는 뭐든 진짜 잘해”라고 진심으로 칭찬했다. 그가 바깥 일로 힘들어하면 “일 그만하고 집에서 조신하게 살림이나 해. 남자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그깟 돈 누나가 벌면 되지”라고 말해주었는데, 이런 농담을 즐거워했다. 남들에게 “지은 씨가 저 이제 계속 집에서 살림하래요”라고 자랑하기도 했다. 실제로 투병생활 동안 내가 밖에서 돈을 벌고 본인이 살림하면서 나는 그를 ‘집사람’으로, 그는 나를 ‘바깥양반’으로 지칭했다.
우리는 서로를 ‘~씨’라고 불렀다. 친구일 때 호칭이 굳은 거였다. 나는 그에게도 ‘씨’를 붙였지만 함께 키우는 고양이들에게도 ‘웅이 씨’, ‘리아 씨’라고 불렀다. 말투도 고양이와 환희 씨에게 차별을 두지 않았다. 제3자에게 말할 때 환희 씨를 ‘반려인’, 웅이와 리아를 ‘반려묘’로 소개했다. 한번은 환희 씨가 우리 엄마에게 “지은 씨는 웅이와 리아와 저를 공평하게 사랑해줘요”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물론 엄마는 이게 왜 자랑인지 이해 못 했고. 이전의 남자들은 우리 집 고양이들을 ‘경쟁상대’로 생각했는데, 그는 기꺼이 셋째 고양이가 되었다. 이런 부분을 자랑으로 생각해주는 사람이 내 반려자라 행복했다.
그는 우리가 “애초에 각자를 위해 설계된 것만 같은” 사이라고 했다. 나는 이를 ‘상호보완 관계’라고 해석한다. 나는 자존심이 세며, 쉽게 욱하고, 남에게 기대는 걸 못 견뎌 한다. 반면에 위기극복 능력과 생활력, 책임감이 강하고 먼저 나서는 편이다. 환희 씨는 여리고 겁이 많으며 경제관념은 어린아이 수준이나, 모나지 않고 욱하는 게 없으며 상대에게 잘 굽혀주는 순한 성향이 장점이었다. 그래서 추진력과 행동력은 내가 맡고, 환희 씨는 서포트 역할을 주로 담당했다. 서로의 약점을 잘 알고 서로를 적당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결혼 생활 동안 한 번도 싸우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러니 “그는 어떤 남편이었나요?”에 대한 대답은, “좋은 남편이었다기보다는, 나에게 잘 맞는 상대였다”로 압축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