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8.
저녁을 먹으며 환희 씨 외장하드에 있는 영화 가운데 한 편을 감상한다. 저장해둔 영화가 꽤 많은데, 내 취향이 아닌 게 대부분이라 선뜻 손이 가진 않는다. 그래도 영화를 보면 시간이 빨리 가니까. 요즘에는 마블 시리즈를 무작위로 한 편씩 보고 있다.
오늘은 <닥터 스트레인지>를 봤다. 사고로 손이 불구가 된 스트레인지가 카트만두에 가 에이션트 원에게 낫게 해달라고 사정하는 모습을 보며 시엄마를 떠올렸다. ‘불행히도 시엄마가 만난 자연치유 박사는 에이션트 원이 아니었고, 당신도 닥터 스트레인지가 아니었네’ 생각하다가, 아직도 내가 시엄마와 화해하지 못했고 당신의 질병에서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시엄마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맥락을 알고 있다. 본인이 암에 걸려보았고, 수술을 거부하고 자연치유를 선언한 뒤 10년을 살아냈으니까. 당신을 살려낸 그 방법이 당신 아들도 치료해줄 것이라 믿었으리라. 그리고 “그거 안 하면 네 시엄마 한 맺혀 죽는다”는 시아빠 말대로, 그분은 그런 행동을 해야만 본인이 살 수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나도 그가 보내는 수많은 택배 상자를 버리지 않고 그대로 받아 안았던 것이고. 그럼에도 아직도 그를 용서하지 못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오늘 만난 지인에게 이런 내 마음을 고백했더니 썩 괜찮은 대답이 돌아왔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 식대로 해석해본다. 흔히 모든 일에는 일어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엄마와 내가 이런 관계가 된 이유. 지인은 그의 존재가 환희 씨와 나를 좀더 돈독하게 묶어주기 위해서였으리라 추측했다. 공동체는 바깥에 공공의 적이 생기면 내부가 좀더 단단해지곤 하니까. 만약 그분이 없었다면 그 지난한 병간호를 오직 사랑으로만 채울 수 있었겠느냐고. 그러니까 시엄마는 우리 부부에게 마블 속 타노스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나는 그 전쟁을 이겨내려고 고군분투하던 캡틴 마블이었고, 내가 타노스와 싸우는 동안 보이지 않던 이환희 씨는 세계의 절반이 사라질 때 먼지가 되어버린 스파이더맨...
당시 나는 시엄마에게서 내 반려인을 지키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환희 씨가 종일 나만 찾기도 했고, 내가 자리를 비우면 이 친구를 어떻게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온종일 이를 꽉 깨물고 있어서 치통과 턱에 근육통이 생겨버렸지만, 대신에 환희 씨의 남은 2개월을 온전히 함께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내 곁에는 든든한 지원군들도 있었다. 언젠가 환희 씨가 “나는 영화 <아무르>를 보고 언젠가 다가올 부양이 너무 무서웠는데, 당신 덕분에 그 영화가 얼마나 못 만들었는지 알았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영화는 반신불수가 된 아내를 남편이 혼자 정성껏 돌보다가 결국 아내의 숨통을 끊고 본인도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다. 그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혼자였으면 당신 포기했어’라고.
환희 씨 병이 점차 악화되던 재발기 초반에, 우리 가정에 주어진 수많은 짐을 혼자 이끌어가기가 버거워 그에게 ‘요양병원’을 제안하기도 했다. 암에 걸려 음식을 거부하는 고양이 부양에, 자꾸만 어린아이가 되어가는 남편 뒷바라지, 매일 해야 하는 회사 업무와 삼시 세끼 돌아오는 집안일까지 혼자 감당해야 하는 나날 속에 버티고 버티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좀 도와달라고. “상황이 이 정도였으면 엄마를 불렀어야지” 외치며 달려온 엄마 덕분에 버텼고, 곧이어 힘쓰는 일을 도맡겠다며 올라온 시아빠 덕분에 견뎌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자연치유 음식을 택배로 조달한 시엄마도 <아무르> 같은 상황을 만들지 않는 데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비록 어머님이 보낸 택배 음식들이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해도, 어찌되었든 생활비에 보탬은 되었다. 환희 씨가 미처 못 먹고 간 그 음식들을 아직까지 내가 먹고 있는 것을 보면.
앞서 모든 일에는 일어나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반려인의 죽음은 어떤 이유로 왔을까. 당신의 죽음을 하찮게 만들지 않으려면 나는 내 삶을 좀더 의미 있게 가꾸어야 한다. 당신 없는 삶을 불행으로만 채운다면, 당신의 죽음은 내 불행을 낳기 위한 결과가 되어버릴 것이다. 당신이 사랑하던 당신의 가족을 내가 미워하는 건 우리 부부 생활을 새드앤딩으로 만드는 지름길임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