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6.
무심결에 창문을 열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고 바람마저 포근하니 산책하기 좋은 날씨다. 날이 풀렸나 보다. 어쩌면 계속 따뜻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집 밖을 나서지 않아서 매일 바뀌는 날씨에 관심을 두지 못했다. 문득 햇살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만에 산책을 나섰지만 처음부터 당신과 매일 걷던 북쪽 산책로로 향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리아를 뿌려준 곳에 가려다가 문득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그쪽으로 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아에게는 미안하지만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가을에 당신과 함께 마지막으로 걸었는데 벌써 겨울이다. 온 동네가 당신과의 추억이고, 걸음마다 당신 생각이 나서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돌아다녔다. 단풍이 사라져 삭막해진 한옥마을을 거쳐 240년 된 나무를 지나고, 한창 공사 중인 공영 주차장을 지나친 다음 진관사에 도달했다. 진관사 입구에서 합장하고 목례를 세 번, 진관사 마애 아미타불 앞에 서서 목례를 세 번 한 다음에 아미타불에게 당신의 안부를 물었다. 다음으로 대웅전 입구에 가서 다시 목례를 세 번 한 뒤에 당신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당신은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 그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당신이 매일 떠오던 진관사 물도 마시고 싶었는데 겨울이라 다 얼었더라.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했다.
한옥마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당신과 함께 “여기 텃밭 관리를 잘하네”, “자기야, 저런 집은 어때? 마당에 개 키우기 좋겠다”, “저런 집은 관리하기 힘들어, 난 평생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 “그래, 나도 이런 구경하는 집 되기는 싫다” 따위의 시덥잖은 품평을 주고받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족사진 스튜디오 앞도 지나쳤다. 방사선 치료 때문에 빠진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면 여기서 커플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그 자리에 머리가 다 자라기도 전에 당신이 떠나버렸다. ‘사진 한 장 찍어주고 가지, 뭐가 그리 급했지’ 곰곰 생각하다가 당신이 사진 찍는 걸 별로 안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스튜디오 앞에 잠깐 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동네를 여행했다.
오랜만에 해를 받고 산책해서 그런가, 아니면 날씨가 포근해서 그런가. 이번에는 창을 활짝 열고 집안일을 하고 싶어졌다. 윤종신 음악 CD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행보 2011’을 틀었다. 곧 로봇청소기를 작동시키고, 걸레질하고, 웅이 밥그릇 물그릇을 닦아주고, 웅이 화장실을 청소하고, 고구마 밥을 지어 점심을 챙겨 먹었다. 가벼운 피곤함이 몰려와 침대에 잠깐 누워 쉬는데, 웅이가 다가와 내 옆구리에 자리를 잡고 식빵을 굽기 시작했다. 웅이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아마도 오늘은 살고 싶은 날인가 보구나.
그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당신과 매일 걷던 산책로를 혼자 걸을 담대함이 나에겐 없었다. 거리마다 추억일 테고, 온 동네 어른들이 짝을 지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며 이제 맞이할 수 없는 우리의 미래를 떠올릴 게 분명했다. 그게 두려워서 우리 산책로가 있는 북쪽으로는 고개도 돌린 적이 없다. 오늘의 용기가 의아할 뿐이다. 그런 길을 산책했으니 나도 애도의 다음 단계로 한 걸음 나아간 것일까.
어떤 날은 당신과 함께할 수 있다면 죽음도 불사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목숨을 버릴 만큼 용감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당신 없이 씩씩하게 고개 들고 살 만큼 강인하지도 못하다. 그저 오늘처럼 살고 싶은 순간순간을 조금씩 모으다 보면 주어진 생이 끝나고 당신 곁에 가 있지 않을까 믿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