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도 나는 고마운 기억일까

2021.01.01.

by 아나스타시아

아프기 전 당신의 노래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주변 모든 결혼식 축가는 당신 담당이었고, 우리 결혼식에 이승환의 <화려하지 않은 고백>을 부르는 당신 보고 다들 “이승환인 줄 알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암세포는 그런 당신의 노래 실력까지 잡아먹었다. 옛날처럼 화려한 기교를 선보이거나 멋들어진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어린이들처럼 목만 사용해 노래 불렀다. 뭐, 그래도 내게는 최고의 가수였지만.


이제 그 노래들을 못 들을 줄 알았는데, 시아빠가 우리 모르게 당신과의 대화를 저장해두었더라. 녹음 파일 몇 개를 받았다. 대부분 녹음은 우리 집 거실에서 이루어졌다. 당신 목소리보다 시아빠 목소리가 더 크게 녹음되어 있어 한껏 집중하며 들어야 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우리 처음 사귄 날을 기념하며 케이크를 먹던 저녁, 아침식사 후 세수를 시키던 이른 오전, 노래에 취해 흥얼거리는 한낮 등 녹음 파일 속 당신 목소리를 몇 번씩 돌려 들었다.


녹음 파일 속 당신은 계속 노래 부르고 있다. 대부분 CD 노래를 따라 부른 것이다. 아침마다 CD 플레이어를 스피커에 연결해 당신에게 틀어주었기 때문이다. 지독한 두통과 사라진 이성, 제어되지 않는 왼쪽 신체 같은 것들에 집중하지 않게 돕기 위해서, 또 자꾸만 휘발되는 기억력을 붙잡기 위해서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CD 속 노래들을 들려주었다.


당신은 방금 전 일어난 일은 순식간에 까먹어도 과거에 들었던 노래 가사만큼은 기막히게 떠올렸다. 특히 윤종신 CD 가운데 後半이라는 음반에 반응이 좋았다. 앨범 속 윤종신이 공부 잘할 것 같이 생긴 앳된 청년 모습을 하고 있는 만큼 꽤 오래된 음반일 것이다. 당신은 박정현과 함께 부른 <우둔남녀>만 나오면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가슴속에서 울고 있죠. 떠나지 말라고. 그 짧은 한마디에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 또 다른 약속 할 것만 같은데...” 사랑하지만 이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앞둔 남녀 이야기. 그 노래를 열창하는 당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우리 상황을 떠올리며 부르는 건가’ 곰곰 생각해보고는 했다.



신청곡을 받아 노래 부르는 순간도 녹음되어 있다. 자꾸만 잠드는 당신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서 시아빠와 나는 쉴 새 없이 신청곡을 청했다. 시아빠의 신청곡은 보통 성시경의 <난 좋아>였다. 이 역시 내가 틀어놓은 CD 노래 가운데 한 곡이었는데, 제목을 모르는 시아빠는 자꾸만 당신에게 “‘괜찮아’ 한번 불러봐”라고 청했다. 노래 가사에 ‘괜찮아’가 많이 나오니 그게 제목인 줄 아셨던 것 같다. <난 좋아>는 이별한 연인을 우연히 마주쳤다가 어색하게 헤어진 후 혼자 읊조리는 내용이다. 노래 주인공은 아직 미련을 못 버리고 ‘다시 돌아오고 싶다면 난 좋아’ 중얼거리는데, 상대가 그냥 가던 길 간 것을 보면 별 가능성은 없었던 듯하다. 이런 노래를 왜 자꾸만 청하실까. 의아했다.


아마 “너에게도 나는 고마운 기억일까”라는 가사에 마음을 빼앗기신 것 같았다. 한창 노래에 취해 부르는 당신에게 자꾸만 물었다. “환희야, 나는 너에게 고마운 기억이었어?” “지은이는 너에게 어떤 기억이야? 고마운 기억이야?” 그때마다 당신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덕분에 고맙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나도 당신에게 신청곡을 자주 청했다. 우리 결혼식 축가였던 <화려하지 않은 고백>과 우리가 처음 사귀는 날을 떠올리게 하는 윤종신의 <환생>을 주로 요청했다. 당신은 내 신청곡을 거절한 적이 없었고, 매번 열창해주었다. 심지어 꾸벅꾸벅 졸면서도 옆구리를 탁 치면 이어서 노래를 불렀다. 잘 때 건드리면 얼마나 짜증나는데, 그깟 노래 부르라고 깨웠는데도 당신은 짜증 한 번 내지 않았다.


엄마 친구가 속상한 마음에 엄마에게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결혼 안 시켰을 거야, 그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 듣고 곰곰 생각해보았는데, 지금 같은 결론이 나왔다고 해도 나는 당신과 만났을 것 같다. 당신에게 내가 고마운 기억이었던 것처럼, 나도 마찬가지거든. 내 생에서 당신과의 5년을 빼고 나면 나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오늘은 녹음 파일 속 당신이 듣고 있던 윤종신의 後半 음악을 반복해 들었다. <배웅>의 가사가 마음에 남는다.


“머나먼 길 떠나는 사람처럼

마치 배웅 나온 것처럼

다시 돌아올 것 같은 그대

사라질 때까지 보네

한번만 더 안아보고 싶었지

내 가슴이 익숙한 그대

안녕이라 하지 않은 이유

그댄 알고 있나요

언제 어디라도 내겐 좋아요

혹시 나를 찾아준다면

내가 지쳐 변하지 않기를

내 자신에게 부탁해

이렇게 해야 견딜 수 있을 거야

영영 떠나갔다 믿으면

내가 포기해야 하는

남은 날들이 너무 막막해

아무도 날 말리지 않을 거예요

잊지 못할 걸 알기에

그냥 기다리며 살아가도록

내내 꿈꾸듯 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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