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31.
12월 31일마다 페이스북에 올린 ‘과거의 오늘’을 보면 내년을 기다리며 세워놓은 목표가 주르륵 나열되어 있다. 매년 마지막 날이면 새 다이어리를 장만하고 내년 목표를 세웠다. 다이어리 제일 앞에 새해 목표를 적어두고 얼마나 이루었나 연말에 들여다보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TO DO LIST 만들기를 즐겼고, 리스트를 보며 빨간펜으로 밑줄을 좍좍 그을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
내가 세운 목표는 시간문제일 뿐 언제나 내 손에 들어왔다. 내년 목표를 ‘회사에서 책을 제일 많이 읽는 사람’으로 세우면 그해부터 3년 연속 사내 리뷰왕을 달성해버렸다. ‘하루 한 시간 운동하기’와 ‘하루 한 시간 중국어 공부하기’를 동시에 목표로 세웠는데 시간이 여의치 않다면 새벽에 일어나서 운동가고, 점심에 샌드위치 먹으며 중국어 공부를 했다. 새해 목표가 ‘집밥 먹기’이면 주말마다 반찬을 만들어두고 점심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덕분에 전 직장에서 별명이 ‘자기계발녀’였다. 좋은 말로 자기계발이지, 성실강박 아니었나 싶지만.
스스로를 잘 알기에 평소에 결심을 자주 하지 않았다. 일단 결심하면 무조건 해내버리기 때문이었다. 경쟁은 싫어하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은 즐겼다. 목표 달성이 제일 쉽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한껏 기고만장해져서 ‘이번 생은 망했어’ 외치며 변화하기를 포기하는 지인이나 결심만 무한히 세우고 작심삼일로 끝내는 동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주변에 무기력증에 걸린 이를 바라보며 ‘어째서 저렇게 의지가 부족할까’ 생각해버린 적도 있다.
그런 성실한 나날이 있었나 무색하게 올해는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내년에 뭐해 먹고살지 고민이라는 친구에게 말했다. “나는 그냥 되는 대로 살려고. 인생이 너무 짧더라고, 그냥 막 살아. 계획 따위 안 세워도 그만이야”라고 말해버렸다. 계획 세우면 뭐하나. 불의의 사건 하나만 터져도 삶의 뿌리가 뽑히는 게 인생인데 싶어서.
당신의 죽음은 내 계획에 없었다. 리아와 당신이 동시에 수술대에 올랐다가 동시에 떠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나는 자기계발따위 전부 무시하고 하루 반나절 당신과 떨어져 있게 만드는 회사도 그만두고 24시간 당신 곁에 붙어 있는 것을 내 2020년 계획으로 삼았을 것이다. 쓸데없이 헛발질한 내 2020년 계획은 5월에 이미 전부 무너졌고 이제 당신도 리아도 내 곁에 없다. 이런 상황에 목표니 계획이니 거창한 다짐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허망하다.
시엄마는 종종 내게 “하느님이 이렇게 하신 뜻이 있을 게다. 시간이 지나면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겠지”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동의하지 않는다. 나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당신을 데려간다는 게 말이 되나.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깨달음을 주려고? 당신을 주어야만 받을 수 있는 깨달음이라면 기꺼이 반납하겠다. 당신의 죽음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하느님은 신이 아니라 살인자다.
강우일 주교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손을 들고 질문을 하는 시간에 한 남자가 격앙된 목소리로 질문했다.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면 세월호 속 그 많은 아이들을 왜 죽게 내버려두었나요? 하느님은 전지전능하다면서요.”
분노의 찬 그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던 강우일 주교는 한참 말을 고르다가 입을 뗐다. “하느님이 당신 곁에서 울고 계신다”고. 내가 생각하는 신은 이런 모습이다. 당신을 신의 이름으로 데려간 뒤에 상을 주듯 깨달음을 건네는 이가 아니라, 내 곁에서 내 슬픔을 함께 느끼고 있는 존재.
사람들은 당신이 하느님 곁으로 갔다고 하던데, 그럼 당신은 지금 하느님과 함께 내 곁에서 울고 있을까. 가뜩이나 눈물 많은 당신이 2021년 계획조차 세우지 못하는 나를 보며 한없이 슬퍼하고 있을까. 그리 생각하면 2021년 계획을 세워야겠지만, 당신 없는 삶에 어떤 계획을 채울 수 있겠니. 진퇴양난. 이제는 당신 없는 삶에 계획을 세울 수도 없고, 내 곁에서 울고 있을 당신을 위해 계획을 세우지 않을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