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03.
오랜만에 당신 고향인 상주에 내려갔다. 당신 없는 시골은 처음이라 어색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즐거웠다. 시아빠와 함께 당신 물건이 쌓여 있는 다락방에 올라가 당신이 중고등학교 시절에 열심히 모았을 음악 CD와 DVD를 구경하고, 먼지 쌓인 앨범을 꺼내왔다. 낡은 앨범 속에는 꼬꼬마 시절 당신이 가득 있었다. 두 분이 쉴 새 없이 당신 자랑을 했다. “이건 처음 유아세례받을 때야”, “환희는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네 살 때부터 글을 읽었다. 슬이(환희 씨 누나) 한글 가르치는 옆에서 곁눈질로 깨버렸어”, “여기는 **동 살 때네. 여기서 중학생 때까지 살았지.” 한껏 달뜬 목소리로 설명하는 시부모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드렸다. 이렇게 즐거워하시는 줄 알았다면 당신과 함께 있을 때 앨범 한번 함께 봤으면 좋았겠다. 당신 대신 내가 효도 좀 했다.
당신 없이 우리는 산책도 했다. 길 건너 숲길을 한 시간 정도 셋이 나란히 걸었다. 당신과 함께 밤을 줍던 그 산이다. 그때는 아무도 밤을 줍지 않아 바닥에 밤이 막 굴러다녔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더라. 함께 산을 타며 계속 당신 이야기를 했다. 그분들은 20대 이전의 당신을 주로 이야기했고, 나는 최근의 당신에 대해 주로 설명했다. 시엄마는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전혀 몰라서 내가 하나하나 다 이야기해주었다. “환희 씨는 식혜 말고 수정과 좋아해요”, “환희 씨는 조기 안 좋아해요. 생선 종류는 갈치, 삼치만 좋아해요” 같은 것들.
상주 방문이 화기애애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당신 이야기로 한참 즐거워하다가 병간호하던 시절 이야기가 나왔다. 당신 방사선 치료부터 하늘나라 가기 전까지 당신 간호하느라 너무 고생한 우리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는 나에게 시엄마가 운을 띄웠다.
“네 엄마한테 효도하는 방법이 뭔 줄 아나?”
무슨 말을 할지 빤하다. 그 질문이 나오자마자 언성을 높였다.
“어머니, 재혼 이야기 꺼내지도 마세요.”
“아니, 나는 네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빨리 잊고 다른 남자 만나서 애기 낳고 살면 좋잖니.”
“그러면 어머니는 입양하세요. 아들 빨리 잊으려면 아들 입양하시면 되겠네요!”
나는 소리를 지르며 바락바락 대들고, 시엄마는 눈물바람이고, 시아빠는 안절부절못했다. 잠깐의 평화는 결렬되었다.
시아빠와 단 둘이 장을 보러 읍내에 나왔을 때, 자꾸만 시엄마에게 버럭 화를 내는 게 고민이라 이야기했더니 시아빠가 대답했다.
“슬이(환희 씨 누나)랑 둘이 ‘어떻게 환희는 저렇게 지 엄마랑 똑같은 사람을 만났지’ 했다.”
그 말에 박장대소했다. 내 인생 최대 라이벌과 내가 똑같다니? 미워하면 닮아간다더니 그 일종인가? 어디가 그렇게 닮았다고 생각하셨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직설적으로 말하는 거. 자기가 주도해서 일을 추진해야 속이 풀리는 거.”
시아빠는 시엄마와 부부싸움을 하면 늘 크게 상처받는다고 한다. 시엄마는 단 한마디로 벌처럼 날아서 시아빠 가슴에 대못을 때려박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나중에 시아빠는 시엄마에게 “당신 시를 좀 써봐라. 당신은 시인하면 잘할 거다”라고 조언했다. 어떻게 그 상황에 그런 단어들을 딱딱 만들어내는지 신기하다는 말과 함께.
그 능력은 나도 못지않다. ‘재혼하라’는 이야기에 ‘당신은 입양하라’고 대꾸하는 내 모습에 다들 ‘어떻게 그 상황에 그런 표현을 생각해내냐’며 혀를 내둘렀다. 시엄마가 한 이야기 가운데 ‘저 말은 사과받아야겠다’고 생각하면 바로 말했다. “저 어머니한테 따질 거 있어요.” 내 입에서 이 말이 나오면 시엄마의 동공은 흔들렸고, 이내 ‘미안하다’ 소리가 나왔다. 시아빠는 시엄마와 40년 가까이 살았지만 그분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고 한다. 우리 엄마는 말했다. “그 대단한 고집을 꺾었다니. 하여간 이씨 집안 고집은 알아줘야 해.”
시엄마는 무슨 일을 추진하든 전면에 나서야 하는 타입이다. 교사 시절에는 교장 교감이 자신의 의견을 듣지 않는 등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집에 와서 종일 울었다고 한다. 시엄마는 누군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본인 사비를 털어서라도 그의 결핍을 채워주려는 사람이다. 성당 활동도 활발하고, 베트남 학교 짓기 모금 활동이나 교도소 자원봉사 같은 행사들도 빠지지 않는다. 떡을 만들거나 김장을 하면 동네에 전부 나누어먹어도 남을 만큼 만들어 나누어준다. 어떤 일에든 먼저 나서는 덕에 동네 사람들이 언제나 시엄마의 의견을 최고로 쳐주었다고 한다.
나 또한 ‘이건 내 일이다’ 생각이 들면 절대 물러나는 법이 없다. 우리 엄마는 나에게 그놈의 “제가 할게요” 좀 그만하라고 했다. 나서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궂은 일 앞에서 피하는 법은 없다.
결국 불과 불의 만남이었다. 시엄마와 나의 알력 다툼에 당신부터 우리 엄마, 시아빠, 당신 누나에게 불똥이 계속 튀었다. 그 불똥은 꾸준히 커져 주변에까지 번졌다. 시엄마는 매일같이 누군가에게 전화해 한 시간씩 하소연했고, 나는 분노가 담긴 글을 SNS에 쏟아냈다. 서로 이기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다함께 지는 길이 아니었을까 싶다.
상주에 다녀온 후 시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와주어서 고맙다고, 며느리가 온다니 아들 영혼이 같이 따라온다는 마음에 설레었다고. 언제든 또 들려달라는 말에 그러겠다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