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처럼 찾아드는 당신의 흔적

21.01.12.

by 아나스타시아

입맛을 잃었다. 우리는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만 보면 꼭 두 조각을 사서 사이좋게 반씩 나누어 먹었는데, 이제는 케이크를 한 조각도 반쯤 먹으면 지겨워져 포크를 내려놓는다. 밥도 맛이 없다. 차려 먹기 귀찮아서 그냥 후라이팬에 찬밥 한 그릇, 멸치 한 줌, 김치 한 줌, 고추장 한 숟가락 넣고 볶은 다음에 두 끼로 나누어 먹는다. 먹는 양이 극도로 줄어들다 보니 과일과 야채는 냉장고 야채 칸에서 계속 시들어가고, 엄마가 만들어주고 간 반찬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런 내가 웬일로 오늘 점심은 한 그릇을 거의 다 비웠다. 동료와 오랜만에 함께 간 맛집은 정갈하고 정성스러워서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끼게 했다. 함께 있던 이가 따뜻했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점심을 근사하게 먹고 나니 다시 입맛이 도는지 저녁도 예쁜 접시에 그럴듯하게 차려 먹고 싶어졌다. 냉장고에 2주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두부를 꺼냈다. 유통기한이 지났지만 뭔 일 있겠나. 조금 아프다 말겠지. 오랜만에 깐소 두부를 해먹기로 결정하고 요리책을 찾아 서재에 들어갔다. 요리책을 꺼내든 순간 내 눈에 비친 수많은 태그들. 집에서 당신을 간호할 때 놀이하듯 함께 붙인 것이다. 그 태그들을 마주한 순간 그 자리에서 혼자 주저앉아버렸다.


병원 호스피스에서는 나름의 계획과 프로그램을 통해 환자의 무료함을 달래주지만 집에는 당연히 그런 프로그램이 없다. 가족들이 알아서 환자가 고통에 침잠하지 않고 지금 기쁨을 느낄 만한 요소들을 끊임없이 찾아다녀야 한다. 처음에는 지인들을 불러 함께 시간을 보냈으나 당신이 점차 가족 앞에서도 간질 발작을 일으키고, 너무 많은 에너지 소모로 힘겨워해서 가족과의 시간에 집중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당신의 집중력은 길어야 3~5분 정도밖에 가지 않아서 책을 읽어주거나 동영상을 보여주는 건 한계가 있었다. 체력도 극도로 줄어들어서 하루 30분 산책도 버거워하고 산책 중에도 잠만 자기 일쑤였다. 집안 탐험도 하루이틀이고, 그렇다고 계속 잠들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낮에 잠들면 새벽 내내 끙끙댈 테니까. 곰곰 고민하다가 머릿속에 음식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당신을 위해 집에 있는 요리책을 잔뜩 꺼냈다.


“자, 우리 요리책 보면서 자기가 먹고 싶은 요리에 표시하는 거야. 먹고 싶은 음식 나오면 ‘스톱!’ 하고 외치는 겁니다. 알겠죠?”


당신은 신이 나서 “네!” 하고 소리쳤다. 먹고 싶은 게 너무 많다 보니 당신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스톱!”을 외쳤다. 미역국, 꽃게탕, 낙지연포탕, 갈치조림, 낙지볶음 등 평소에 좋아하는 재료가 들어간 음식에도 체크했지만 병어조림, 홍어회무침, 김치밥전 같은 좋아하지도 않고 먹어본 적 없을 법한 음식들 앞에서도 무조건 스톱을 외쳤다. 그런 당신이 너무 귀여워서 “이렇게 하면 안 먹고 싶은 음식 체크하는 게 더 빠르겠다. 안 먹고 싶은 요리가 대체 뭐야” 물으며 함께 웃었다. 그때 붙인 그 태그들이 당신이 여기 살아 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매일 요리해도 한 달은 넘게 먹어야 할 만큼의 태그를 잔뜩 붙여놓고 그렇게 빨리 가버리니. 열심히 스톱을 외치며 붙인 태그들이 이제는 쓸모가 없어졌잖아. 그렇게 한참 요리책을 들여다보다가 부엌으로 돌아와 요리책 레시피를 따라 깐소 두부를 만들었다.


유통기한 지난 두부로 만든 깐소 두부는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았고, 나는 다시 입맛 없는 시절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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