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두 달 전, 아기를 가지자는 제안

21.01.13.

by 아나스타시아

시아빠와 엄마, 나, 당신 넷이 밥을 먹는데, 갑자기 당신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우리 아기 가질까?”라고 말을 건네었다. “응? 아기? 갑자기?” 순간 당황해서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남은 생이 두어 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건넨 말인가? 아니면 음악 CD에서 윤종신의 <Oh My Baby>가 흘러나왔기 때문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당신 입에서 ‘아기 갖자’는 말이 나오는 장면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당신은 결혼하기 전부터 ‘우리가 아기를 가지면 안 되는 이유’를 열심히 설파하던 사람 아닌가.


평소에 당신은 ‘내가 혹시라도 아기 낳자고 할까봐 두려운가’ 싶을 정도로 수시로 우리가 아기를 가지면 안 되는 이유를 열거했다. 한번은 내게 “자기가 정말 아기 가지고 싶은 날이 오면 말해줘. 근데 사회가 낳으라고 해서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자기가 정말 가지고 싶은 건지 진지하게 고민해줘”라고 이야기했다. 남들 다 하니까 따라 가지는 말자는 제안이었다.


아기를 가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당신 안에 있는 ‘자기혐오’의 발현이자 ‘생존욕구’의 일환이기도 했다. 당신은 당신의 유전자를 세상에 남겨놓고 싶지 않다고 했다. 당신같이 차갑고 공감능력 없는 사람이 자기 곁에 하나 더 있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게다가 당신은 어머니에게 받은 연약한 체질을 원망했고, 자기 자식에게 그와 같은 원망을 넘겨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기를 낳는 순간 자신의 수명이 절반으로 줄어들 것 같다고 두려워한 적도 있다. 아기로 인해 우리 부부가 정신적‧육체적으로 힘들어질 테고, 우리가 아닌 다른 이유로 서로에게 지치는 상황도 두렵다고 했다. 자신에게는 아내 하나와 고양이 둘을 보듬는 에너지가 최선이라고, ‘우리 집에 셋째는 없다’고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동시에 ‘아기 없는 삶’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수반한 결과이기도 했다. 우리는 둘 다 출판편집자이고, 10년 뒤에도 현역으로 뛰고 있을지 걱정할 만큼 직업 수명이 짧기도 하다. 한번은 생협에서 장을 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당신이 뜬금없이, 우리에게 아기가 생기면 이런 중산층 코스프레도 끝이 날 거라고, 지금의 여유로운 생활을 버리고 싶지 않다는 말을 던졌다. 우리가 사람 둘과 고양이 둘을 먹이고도 밥 굶을 걱정하지 않고 사회단체에 기부도 하며 살 수 있는 이유는 아이가 없기 때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한번은 말도 안 되는 극단의 날씨를 바라보며 “아기 낳으면 안 되겠다. 지구는 망했어. 기후위기가 도래하는 이 상황에 다음 세대에게 좋은 환경을 물려줄 수 없어”라고 중얼거린 적도 있다. 하도 여러 번 이야기하는 모습이 꼭 ‘무의식으로라도 아기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면 큰일난다’고 주문을 외우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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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당신의 결심은 이토록 다양하고 깊게 고민하고 함께 여러 번 토론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친한 언니들로부터 아기가 생기면 일어나는 수많은 억압과 성차별, 경력단절 이야기를 잔뜩 듣고 자란데다가, 딱히 자식 생산에 관심도 로망도 없던 나는 당신의 말에 수긍했다.


“그래, 우리는 아기 가지지 말고 고양이랑 넷이 사이좋게 지내자.”


그런 당신 입에서 ‘아기’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그것도 원가족이 듣는 앞에서. 그 상황이 하도 생뚱해서 엄마에게 “왜 환희 씨가 갑자기 아기를 가지자고 했을까” 물었다. 엄마는 곧장 “아기 안 만든 게 후회되나 보지, 뭐”라고 대답했다. 설마. 당신이 얼마나 깊이 사고해서 내린 결정인데. 내가 아는 당신은 그 결정을 후회할 사람이 아니다. 당신이 후회할 때는 언제나 당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나 상처로 돌아갈 때뿐이었다.


만약 당신이 후회라는 걸 했다면 ‘세상에 아기라는 존재를 남기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기보다는 ‘귀하게 대해준다고 결혼해놓고 병간호 시키고 아내보다 먼저 떠나게 된 것’을 후회할 확률이 높다. 내 추측이지만 당신이라면 남겨진 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아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까 싶다. 당신은 리아와 본인이 동시에 아프면서 내게 큰 짐을 지우게 만들었다고 한없이 미안해하던 사람이니까. 리아와 당신이 사라진 그 자리를 자기와 닮은 누군가가 채워주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그 아이는 당신이 아니지만 당신만큼 든든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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