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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스타시아 Jan 21. 2021

우리의 목소리는 더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말하는 몸

8년 넘게 다닌 직장을 떠나기는 쉽지 않았다. 줄곧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생각이 내 안에 있었고, 그 불편한 마음이 모여 몸 여기저기에 작은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어도 애써 무시했다. 힘들다고 하소연하면 “밖은 지옥이야”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 말에 동의했다. 이 정도면 출판사 규모도 크고 사람 대접해주고 전반적으로 무난한 회사니까, 같은 업계 동료들의 노동환경에 비하면 여기는 정말 최고의 직장 아닌가, 같은 생각들이 내 용기를 막았다.



‘이직해야겠다’는 결심은 정말 만들고 싶었던 기획이 팀 기획회의조차 통과 못 하고 어그러졌을 때 처음 확신했다. 지인의 소개로 ‘여성의 몸’을 ‘여성의 목소리’로 읊어주는 팟캐스트를 기획하고 있다는 오마이뉴스 유지영 기자와 CBS 박선영 PD를 소개받았다. 우리는 합정 모 프렌차이즈 카페에서 처음 만나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첫 인상은 어렴풋한데, 박 PD님은 야무지고 단단한 느낌이었고, 유 기자님은 여리고 순한 분 같았다. 처음 만났지만 비슷한 나이 대와 경험, 무엇보다 여성이라는 공감대가 크게 작용해 금세 분위기는 부드러워졌다. 팟캐스트 기획 취지를 담은 종이 한 장을 앞에 두고 ‘이거 우리 책으로 만들자’고 의기투합했다. 박 PD님은 나를 “편집자 님은 숨어 있는 우리 스텝이에요”이라 이야기해주었고, 유 기자님은 “저희 팟캐스트에 출연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빈말이었겠지만 나를 동료로 인정해주는 것 같아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좋았다.



만들고 싶었고,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통과시키기 위해 그 어떤 기획안보다 정성을 들였다. 방송 전 녹음들도 따로 받아 미리 들어보고, 녹취도 풀었다. 이용수 할머니 목소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단순한 문장에 진실된 목소리가 입혀지면 마음을 울릴 수밖에 없음을 느꼈다. ‘이 감동을 어떻게 책으로 구현하지?’ 기획안을 쓰면서 그런 생각이 스쳐가기도 했다.



두 사람에게 몇 번씩 보여주고 수어 번 보완해 만들어낸 기획안을 기획회의에 가져갔다. 팀 기획회의 때 분위기를 기억한다. 상사는 자꾸만 기획안을 앞에 두고 기획이 아닌 딴소리만 했다. 마지막에 “고민해보고 상신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는데, 결국 2차 기획회의인 이사진 회의에 상신하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회사에 대한 생각,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고민이 확신으로 거듭났다.



그해는 내내 헛발질이었다. 내가 속한 팀은 저자와 이미 완벽하게 조율한 기획안을 상신하기를 바라는 곳이었다. 그 해에 저자와 함께 기획안을 쓰고 나름 구성을 짜서 제출한 기획안만 30건 가까이 되었는데, 계약 통과는 2건이었다. 저자에게 “고생하시게 만들어놓고 통과 못 시켜 죄송하다”고 말하는 힘없는 내가 그렇게 싫었다. 나는 왜 능력이 이거밖에 안 돼서 자꾸만 죄송할 짓을 만드는가. 연말 평가기간에 상사에게 물었다. “이 정도 타율이면 제가 이 회사와 맞지 않음을 인정하고 알아서 나가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 질문에 상사는 “너보다 내가 더 안 맞는다”고 대답했는데, 그 말이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러고도 1년 정도 더 버티다가 결국 알아서 튕겨져 나왔다. 마지막 날은 구질구질한 연애의 마지막처럼 지저분했다. 퇴사 날 8년을 함께한 동료와 상사로부터 제대로 된 작별 인사조차 받지 못했다. 8년의 마지막이 고작 이건가 싶었다. 떠나야 할 순간을 잘 맞추었다면 받지 않아도 될 상처였다.



새 회사에 입사한 후 유지영 기자에게 연락했다. 내 입지가 바뀌었는데 다시 함께할 수 없겠냐고. 물론 세상에 눈 밝은 편집자는 너무 많고 이미 나보다 더 좋은 편집자, 훌륭한 출판사를 만나 책을 진행하고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씁쓸했지만 내가 이 책을 못한 덕분에 내가 새로운 시작을 만날 수 있었으니 감사하기로 했다.



책을 받았다. 속 좁은 마음에 ‘질투 나서 내 돈으로 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유 기자님이 보내주셨다. 머리말과 본문을 살펴보니 과연 단단하게 잘 만들어졌다. 그때 내가 그분들을 놓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잘 나가주면 좋겠다. 그래서 그때의 내가 맞았음을, 여자의 이야기가 꾸준히 발화되어야 한다고 믿던 우리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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