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다시봄 Oct 17. 2021

칼로 오렌지주스를 벨 수 있다면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나는 누구보다 공감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그들의 상처를 위로하면서 상담사 역할을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팩폭(팩트 폭격)을 날려 독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감성을 지키면서 이성을 잃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약한 부분이 바로 ‘사랑’의 감정이다.




"누나! 온양에 파파이스 생겼는데 닭이나 먹을까?"

"어? 그래."


한 번도 그런 전화를 한 적 없던 사촌동생 'H'가 대학에 진학한 이후 처음으로 연락을 해왔다. 그때가 3학년 여름이었으니까 2년 반 만이었다. 다음 날, 파파이스로 들어가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H와 동행인 남자 때문이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첫사랑 'C'였다. 날 버리고 가톨릭대학교에 진학했다가 2년 만에 자퇴하고 나왔다는 그가 나한테도 아니고 별로 친분도 없던 H와 연락하고 사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잘 지냈어?"

"응. 넌?"

"나야 늘 잘 지내지."

"아. 그래."

"선 보는 분위기네. 내가 빠져줘?"

"아니!"


둘이 동시에 대답했다. 반갑긴 하지만 어색함이 더 컸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시답잖은 얘기들만 하다가 1시간 만에 헤어졌다. 그리고 며칠 후 H에게 또 전화가 왔다.


"나랑 놀러 갈래?"

"어딜?"

"성남 쪽에 좋은 데 있다던데 같이 가자. C도 가기로 했어."

"그래? C한테 나도 간다고 얘기했어?"

"C가 물어보라고 한 거야. 갈 거지?"

"그럼!"


원치 않는 이별을 했던 첫사랑과의 재회는 새로운 설렘을 갖게 했고, 그와의 여행을 제안받고 단번에 오케이 했다. 여행을 준비하는 일주일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먼저 얘기했단 말이지? 나랑 같이 가고 싶다고? 역시   잊고 있었던  틀림없어. 그럴  알았어.'


첫사랑을 떠나 보내고 그만큼 사랑할 수는 없겠다고, 그만큼 사랑하기도 싫다고 다짐해왔는데, 그래서 얼마 전 남자 친구와도 헤어졌는데, 내 맘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나타난 것이다. 너무나 기뻤다. 그래서 더욱 기다림이 행복했다.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으면 좋은 추억만 간직하고 영원한 첫사랑으로 남았을 텐데...

 



여행 당일.

H와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만나 분당선을 타고 미금역에 도착했다. 미금역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단다. 역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을 봤다. 전날 턱에 난 뾰루지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평소 잡티가 잘 안나는 피분데 하필이면 그날 뾰루지가 난 것이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그 자리에 파우더를 푹푹 찍어 바르고 나왔다. 저 멀리 H와 그가 보였다. 그는 날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했다.


"얼른 가자. 차 기다려."

"차? 무슨 차?"

"우리를 여행길로 안내할 차. 가자!"

"응!"


도로변에 봉고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차 안엔 낯익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와 같은 성당에 다녔던 'M'언니였다.


"어? 언니가 웬일이에요? 같이... 가는 거예요?"

"응. 미안해, 뜬금없이. 괜찮지?"

"네..."


기분이 상했다. 탐탁지 않았다. 도대체 왜 저 언니와 같이 여행을 가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그의 애인?'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봉고차를 타는 순간부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차는 10분 정도 달려 어느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여기가 어디야?"

"들어가 보면 알아. 들어가자!"


그가 내 손을 잡았다. 순간 얼었던 마음이 스르륵 녹았다. 다시 기분이 좋아져 그가 데려가는 대로 따라갔다. 건물 2층으로 올라가자 50평 정도 돼 보이는 넓은 강당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는데 누군가 알은체를 했다.


"봄씨죠? 말씀 많이 들었어요."

"안녕하세요! H 사촌누나라고요? 반가워요."

"반가워요, 봄씨!"


나는 모르는데 그들은 나를 잘 아는 것 같았다. 정신없이 인사를 받는 사이 강당 맨 앞자리까지 갔다. 정면엔 이런 플래카드가 나불거리고 있었다. '사업설명회에 오신 당신은 이미 사장님!'


"여기 뭐 하는 데야?"

"널 부자로 만들어 줄 곳이야. 잠깐 앉아있어."


그러고는 사라지는 그. H와 언니도 보이지 않았다. 나와 비슷하게 얼이 나간 사람들이 옆과 뒤에 앉아 있었다.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젊은 남자가 강단으로 올라왔다. 자신을 '다이아몬드'라고 소개하는 그 남자는 친구를 통해 처음 이곳에 왔으며, 그 친구한테 평생 고마워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현재 한 달에 얼마나 버는지 통장을 보여주며 말했다. 공 7개와 맨 앞에 1자가 적혀있었다. 천만 원? 자기는 좀 빠른 케이스로 1년 만에 그 자리에 올라 지금 2년째 거의 고정적인 수입을 벌고 있다고 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남자의 얘기에 푹 빠져 3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3시간 후 난 달라져있었다. '다이아몬드'가 되고 싶었다. 그와 언니와 H가 내게 왔다. 이미 여행은 까맣게 잊었다.


"나 이거 해볼래!"

"잘 생각했어."

"니가 한다고 할 줄 알았어."

"역시 누난 달라."


다들 격려해줬다. 더욱 힘이 났다. 그곳에선 다단계라고 우겼던 그 피라미드 사업장의 판매품목은 물을 넣지 않아도 달걀이 구워지는 냄비와 각종 주방도구들, 만병통치 기능이 내재된 전기담요였다. 그걸 모두 구매해야 비로소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그 금액이 만만치 않았다. 300만 원이었다. 어떻게 그 큰돈을 구할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한 답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돈을 빌려줄 만한 친구나 지인에게 전화를 해서 빌리면 된다고 했다. 선뜻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정말 나를 믿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만나지도 말라고 했다. 돈을 빌려준 사람 하고만 나중에 같이 사업을 하면 된다고 했다.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들이 합숙하고 있는 반지하 연립으로 가서 짐을 풀었다.


M언니가 오렌지주스를 네 잔 따라왔고 다 같이 건배를 했다.

"이제 우리는 한 배를 탄 거야! 봄이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모두 잘 도와줘!"

그가 말했다. 그들 중 그가 캡틴이었나 보다. 멋있었다. 그와 같은 집에서 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출근하게 될 핑크빛 미래가 좋았다.


다음 날부터 친구들에게 싹 전화를 돌렸다.


"내가 방학 동안 교수님 일 도와드리는 알바를 하는데, 노트북을 떨어뜨려서 완전히 망가진 거야. 서비스센터에선 고치는 것보다 사는 게 싸다고 하는데... 내가 돈이 어딨어. 10만 원이라도 좋으니까 좀 빌려줄래?"


이렇게 수십 명에게 전화를 걸어 거짓말을 했다. 그러던 중 전남친에게 전화가 왔다. 받기 싫었지만 한 번에 열 통씩 전화를 걸어대는 통에 마지못해  받았다.


"어디야?"

"왜?"

"너 요즘 돈 빌리고 다닌다며? 무슨 일이야?"

"알 거 없잖아."

"내가 교수님한테 전화도 해봤어. 너 지금 어디야?"

"끊어!"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방망이질 쳤다. 거짓말한 게 들통난 건가? 한편으로는 헤어진 남자 친구가 내 일에 관여하는 게 화났다. 다행히 내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그 후로도 여러 번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전남친을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고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왜냐하면 C가 같이 있었고 그와 함께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든든하고 힘이 되는 지금의 삶을 계속 살고 싶었다.


한 달 후 사업 밑천인 300만 원이 다 모아졌다. 한 번도 그렇게 큰돈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신기하기도 하고, 돈을 빌려준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는 게 중요했다. 그 돈으로 몽땅 물건들을 샀다. 본격적인 사업을 벌이기에 앞서 집으로 휴가를 다녀오라는 허락이 떨어져 나를 비롯해 합숙 멤버들 모두 고향으로 향했다. 각자의 집으로 가기 전에 각오를 다지기 위해 우리는 천안 터미널 앞 골목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은 네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오렌지주스를 시켰다.


"이제 진짜 한 식구가 된 봄을 위하여 건배!"

"건배!"


오렌지 빛깔 잔 네 개를 높이 들어 올려 건배를 했다. 한 모금 마시려는데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봄아!"


뒤돌아 봤다. 거기엔 험악한 얼굴을 한 오빠와 정의감에 불타 있는 전남친이 서 있었다. 한 번도 식구들에게 남자 친구 얘기를 한 적이 없고, 전남친에게도 우리 집 연락처를 알려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둘이 같이 나타났는지 의문이었다.


"집에 가자!"

"싫어!"

"빨리 안 일어나?"


오빠는 이미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상태였다. 지금 안 일어났다간 대낮에 카페에서 싸움이 날 분위기였다. 다들 내게 눈짓을 했다. 그래도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를 뜨면 다시는 그들을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일어나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에게 피해가 갈 게 뻔하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오빠를 따라갔다. 그게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집에 가니 부모님 두 분만 거실에 앉아 계셨다. 걱정 가득한 눈길을 보내는 엄마와는 달리 아빠는 굳은 표정을 더욱 굳히셨다. 두 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

"..."


다른 건 몰라도 그곳이 어디인지 밝히는 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 있었냐니까?"

"..."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정적. 잠시 후 아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답 안햇?"


22년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목소리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꾹꾹 참고 있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엄마가 우는 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그냥 울게 놔두시더니 한마디 하셨다.


"거길 H만 믿고 간 거야?"

"아니. C도 있었어. 내가 좋아했던 남자."

"C라니? 엄만 처음 듣는데?"

"고등학교 때 학생회 하면서 만났다가 헤어졌는데, 거기에 걔가 있는 거야. 그래서..."


다시 눈물이 났다. 그랬다. 결국 사랑 때문에 거기 있었던 거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가셨다. 그리고 다음 날, 방에 틀어박혀 있는 내게 와서 말씀하셨다.


"엄마가 C 만났다."

"왜? 걜 왜 만나?"

"궁금해서 만나봤어. 어떤 앤지. 근데 완전히 실망했어."

"..."

"걘 널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다고 하더라. 만나긴 했지만 좋아서 만난 건 아니라고."

"그럴 리가... 우리 정식으로 사귀었는데?"

"..."

"정말이야!"

"진짜 나쁜 놈이네."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만났고, 얼마  그렇게 친절하던 그의 미소가  가식이었다고? 피라미드 때문에 잃어버린 친구들과 엄청난 , 모두 어떻게든 감당하고 되돌릴  있었지만 간직하고 있던 그와의 추억은? 사랑이라 믿었던  감정이 모두 거짓이었다니...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감당하는 게 너무 버거웠다. 그리고 부모님께, 가족에게 미안했다. 철없는 막내 때문에 가슴 졸였을 그들에게...




그 후로 단 한 번도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친구가 말했다. 그놈은 300만 원짜리라고. 그냥 잊으라고. 물론 나도 안다. 그가 다시는 나를 만나지 않을 거란 걸. 다시는 우리가 연인이 될 수 없다는 걸. 사랑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내가 싫지만, 오렌지주스만 보면 그가 생각나고 그래서 마실 수가 없다. 어쩐지 자존심 상하지만, 아직까지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나 보다. 20여 년이나 지난 일인데도. 어찌 보면 처음으로 '배신감'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한 사건이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게 처음이었기에 모든 게 상처가 됐다. 그가 했던 말과 행동, 추억 모두.
상처는 어떻게든 치유되는 거라고 믿었는데 안 되는 게 있나보다.
여전히 바보같은 생각을 한다.
'그에게 변명이라도 들으면 달라질까? 그렇게라도 그를 만나고 싶은 걸까?'
알 수가 없다, 내 마음을.

 



사진 / 구글 이미지 : Freepik



이전 04화 그녀의 이름은 시사모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맛에도 심리가 있다면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