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은 박형식으로 충분해!
한 남자의 고백을 받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를 보는 눈빛과 행동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말로 고백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알아듣지 못했을 뿐.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이태리어였다!
그는 어떻게든 제대로 된 고백을 하고 싶어 했고 결국 자신의 언어를 통역해 줄 친구를 섭외해서 대리 고백을 했다.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길 한복판에서의 고백. 내용이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내게 와닿았던 그의 마음이 전달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나였다. 그와는 연인이 아닌 친구로 지내고 싶었다.
“당신과 친구로 지내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당신은 연인을 만날 수 없을 거예요. 그러니 당신의 고백을 거절할게요!”
그의 표정을 보지 못한 채 잠에서 깼다. 그렇다. 꿈 얘기다. 8할 이상 현실이 반영된 꿈같은 현실이긴 하지만...
그를 거절한 덴 더 큰 이유가 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문제. 그런 사람과 깊이 있는 대화가 불가능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불현듯 영화 <카핑 베토벤>에서 베토벤이 카피스트 안나 홀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음악적 효과라는 건 없어. 자넨 형식에 강박이 있어.
영화관에서 <카핑 베토벤>을 봤을 때의 충격이 생생하다. 롯데시네마의 웅장한 사운드와 클라이맥스에서 울려 퍼진 '합창교향곡'의 전율 때문이 아니다. 음악과 문학이 평소에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더욱 굳게 해 줘서도 아니다. 바로 저 ‘형식’ 때문이다.
형식... 형식에 대한 강박... 형식에 갇혀 있는 글...
누군가의 고백을 거절한 일과 형식에 갇힌 글이 무슨 연관이 있냐고 묻겠지만 이건 심각한 문제다. 나의 근본을 뒤흔드는 '사건'이다.
내면의 소리를 들어.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이 자넬 감싸면 자네 영혼은 노래할 수 있게 돼.
지인 중에 일본에서 비언어를 공부하는 분이 있는데, 현지인들과 한국어로 말하며 비언어로 대화한다고 한다. 몇 년째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의도적으로 일본어를 배우지 않고 비언어로 대화하고 있다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화가 가능하다고.
한국어가 아닌 이태리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그의 사랑을 거절했다. 언어라는 형식을 집어던지고 그의 고백을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그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숨과 숨 사이의 침묵으로도 대화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악장은 끝나지 않아, 흐르는 거지!
귀가 들리지 않았지만 베토벤은 위대한 음악을 기록했다. 자신에게만 들리는 마음의 소리를 쓰고, 자신은 들을 수 없지만 누구나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을 남겼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는 음악을 들려줬다.
베토벤이 가르쳐준 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었다. 그렇게 살아야 글도 바뀔 거라고. 형식만 쫓고 스타일만 있는 글이 아니라 흐르는 글을 쓰고 싶었다. 아직 살고 있지 못해서인지 쓰는 것도 잘 안 된다.
눈빛과 행동만으로도 그의 생각과 마음을 알았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글 안에 거짓 없이 솔직한 나의 생각과 마음을 담았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삶에서, 글에서 '형식'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