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재료도, 통제 조절 능력도 아니다
뭐 하나에 꽂히면 일할 때나 밥 먹을 때, 심지어 술을 마실 때도 꽂힌 것에 사로잡혀서 산다. 술에 진심인 편이어서 술 마실 땐 술에 집중하는 나로서는 그것에 엄청나게 빠졌다는 증거다.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할 때 로스팅을 배웠다. 로스팅은 커피 생두를 볶아서 원두로 가공하는 작업이다. 겨우 한 줄로 요약이 가능한 일이지만 먹을 수 있는 원두를 볶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맛있는' 원두가 되기를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었고, 먹을 수만 있어도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엄청난 양의 생두를 볶아댔다.
로스팅에는 변수가 많아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서 원두를 볶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볶을 때마다 새로운 맛이 났다. 새롭다기보다는 원하는 맛이 나지 않는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원하는 맛이 나지 않는다는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그것에 사로잡히게 했고 자나 깨나 로스팅 생각에 빠져 있었다. 선생님의 두루뭉술한 가르침에 독학으로 로스팅을 하다가 하도 답답해서 10년 만에 지인에게 연락했다. 같이 영화를 공부하던 동생인데 그 사이 커피 박사가 되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짜고짜 로스팅에 대해 묻는데도 친절한 설명이 줄줄 나왔다.
“로스팅할 때 온도가 기준이야, 시간이 기준이야? 둘 중에 뭐에 맞춰 화력을 조절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좋은 생두를 쓰면 되는 건가…”
“좋은 재료도 온도도 시간도 중요하지만… 그냥 라면 끓이는 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해봐. 물 끓고 4분~4분 30초가 기준점이지만 그전에 라면을 넣고 휘휘 젓거나, 물 버리고 다시 끓이거나, 스프를 먼저 넣거나, 면을 부셔 넣는 등 방법은 조금씩 달라도 라면 맛은 비슷하잖아. 물 양과 면발의 차이가 중요하긴 한데 면발은 중간중간 눈으로 보면 되고. 시간이나 온도가 아니라! 그렇게 접근하면 쉽지 않을까?”
오~~ 유레카!!!
사실 원두를 아무리 잘 볶아도 갈고 내리는 과정에서도 맛은 천차만별로 갈린다. 맛을 결정하는 수많은 변수들을 ‘라면’ 하나로 통합해서 설명해주니 그동안의 모든 복잡한 생각들이 정리되었다.
다음날, 로스터기를 예열하며 라면만 생각했다. 생두를 넣고 10~11분 후에 원두가 될 때까지 라면을 끓이는 거라고. 수많은 변수는 기록으로 남겨놓고 지금 이 순간엔 그저 맛있는 라면을 끓이는 거라고! 그 과정에서 타거나 덜 볶인 원두가 산더미지만 적어도 볶는 동안엔 즐거웠다. 나만이 볶을 수 있는 맛있는 원두에 대한 기대 때문에.
살다 보면 -이렇게 말하니 노인네 같지만- 모든 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종종 아니 자주 든다. 로스팅에 빠져있긴 했지만 막 드라마 작법 수업을 듣고 있을 때여서 자연스럽게 글쓰기와 연결이 됐다.
언뜻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이 세 가지가 연결되는 지점은 좋은 재료도, 수많은 변수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능력도 아니다. 바로 그걸 만들어내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다. 결국 또 마음가짐인 거다.
글을 쓸 때마다 키보드 위의 손을 멈추게 하는 많은 이유가 있다.
좋은 소재인가?
시기적절한 이야기인가?
어떤 장르에 어울릴까?
읽는 사람이 재미있어할까?
너무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글쓰기에 발목이 잡히게 되고 키보드를 점점 멀리하게 된다. 하지만 글쓰기에서 위의 것들보다 우선하는 건 글 쓰는 사람의 마음이 아닐까?
지금 마음 상태는 어떠한가?
지금 쓰고 싶은 글은 무엇인가?
지금 쓸 수 있는 글은 무엇인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두로 라면을 끓이듯이 즐겁게 글쓰기를 하면 된다. 첫눈이 내리는 지금 출근길을 걱정하고 있는 내 마음을 적나라하게 쓰고 후루룩 마셔버리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