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달라서 마음으로 ‘통’했던 길
몸과 마음이 아프면 타인의 관심이 오히려 불편한데, 그 길 위에서 받은 관심은 차원이 다른 사랑이었다.
아프고, 못 먹는 안쓰러운 인간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느끼는 그 감정을 길 위의 사람들이 모두 공유하고 있다는 듯 그들은 서로 돕고 나누기 바빴다. 공통의 마음이 통해서인지 산티아고를 향해 가는 길이 풍요로웠다.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영어를 했다 해도 워낙에 다국적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언어로는 소통이 잘 안 됐다. 인사하고 통성명하고 어디서 왔는지 정도 묻는 선에서 대화가 끊겼다. 그 이후에는 먹을 것을 나눠주고 간단한 스페인어로 축복을 빌어주는 정도가 다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했다고 느끼는 건 그들이 몸으로, 행동으로 보여준 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브루노도 그랬다. 처음 보는 내게 불쑥 다가와서는 국적불명의 말을 해댄 그는 벨기에 사람이었다. 말은 못 알아들었지만, 그는 ‘보여줄 게 있으니 함께 알베르게로 가자’고 하는 것 같았다.
대충 알아듣는다는 눈짓을 보이자, 적극적으로 나를 이끌었다. 물론 그가 한 행동은 한 걸음 걸어가고 날 쳐다보고, 또 한 걸음 내딛으며 날 쳐다보는 게 전부였지만. 처음 만난 내게 뭘 보여주겠다는 건지 궁금해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그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그와 나만 있는 숙소가 아니었기에 의심 없이 선뜻 따라나설 수 있었다.
그가 인도한 곳은 주방이었다. 점심 준비로 북적이는 주방 한쪽에 작은 탁자가 마련되어 있고, 그는 거기가 자신의 작업실인 양 노트북과 온갖 자료들을 어질러 놓았다. 의자를 내주며 앉으라고 해서, 조금 거리를 두고 옆에 앉았다.
어차피 서로 ‘말’로는 ‘말’을 못하니까 그냥 그가 뭘 하는지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 그 역시 묵묵히 노트북만 두드려 댔다.
‘어라? 내 사진이잖아?’
브루노는 씨익 웃으며, 노트북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줬다. 그동안 지나온 마을의 풍경이 담긴 사진들, 그 틈에 버젓이 내 사진이 있었다. 사진 속의 나는 렌즈를 향해 포즈까지 취하고 있었다. 원래 ‘날 찍어주쇼.’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언제 어디서 찍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리둥절한 나와는 달리, 그는 놀란 내 얼굴을 보며 예상했다는 듯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이메일?” ‘이메일로 사진을 보내준다는 얘기겠지?’ “오케이!”
굳이 엄지와 검지로 원까지 만들어가며 목청껏 대답했다.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는 자료들 틈에서 그가 종이 한 장을 신중히 골라 펜과 함께 건네줬다. 정성이 고마워 이메일 주소를 또박또박 써줬다. 그는 나를 향해 또 한 번 씨익 웃으며 즉석 이메일을 날렸다.
고맙다는 말로만 고마움을 표현하는 게 조금 미안해 다른 사진들에 관심을 보이자, 기다렸다는 듯 그동안 찍은 사진들을 꼼꼼히 보여주는 브루노. 그런데 아마추어라고 하기엔 사진이 꽤 수준급이었다.
“굿!” “원더풀!” “오우~예!”
아는 영어 단어를 총 동원해 ‘너, 사진 잘 찍었다.’는 걸 표현했다. 알아듣는 건지 알아듣는 척을 하는 건지 몰라도 아무튼 그도 꽤 좋아했다. 어쩌면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그의 눈에 내가 들고 다니던 무거운 디지털카메라가 눈에 띄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는 1000장이 넘는 사진들을 함께 들여다보며, 같은 취미를 발견한 미팅 상대를 만난 것처럼 즐거운 오후를 보낼 수 있었다.
브루노가 어디에서 렌즈에 나를 담았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와 나는 그때부터 서로를 알아봤던 게 아닐까? 산티아고 가는 길 위에서 친구가 될 거라는 것을!
가수 김종국을 좋아하는 독일 소녀 마틸다와 한국 노래를 부르며 라면을 나눠먹고, 사과나무 아래에서 이태리 남자 마르코가 따준 사과를 쪼개 먹으며 ‘정’을 나누고, 그 후로도 만날 때마다 사진 찍는 기술을 알려준 벨기에 아저씨 브루노 등 많은 외국인들과의 소통과 교감이 얼마나 값진 시간이었는지.
그들과의 만남이 길을 떠날 때 지녔던 상처의 반은 치유해 주지 않았을까?
그들이 마음으로 건넨 웃음과 사랑을 가슴에 새기고 왔기 때문이겠지?
지금도 산티아고라는 단어에 가슴이 뛰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