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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 Oct 21. 2024

아낌없이 사랑을 주던 나를 되찾을 수 있을까?

사랑과 이별의 공통분모

그와 이별했지만 이별의 과정은 더뎠다.

잊으려 노력하면  할수록 그를 더 사랑하게 되는 아이러니에 당황스러웠다.


어디를 가도, 누구와 있어도 그의 흔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벗어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에 대한 사랑이 깊어갔고 그리움에 사무쳤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그와 이별하는 중이다.




안 먹고 버티는 게, 먹어서 아픈 것보다 나은 날들이 계속됐다.

위경련은 쉽게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유럽의 길 위를 한 달이나 걸을 수 있는 영광을 누리면서도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하고 눈으로만 먹어야 하는 쓰라린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한 여름의 땡볕을 걷는 강행군을 이겨내려고 하루에 한 끼는 고기를 꼭 먹어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고기는커녕 초콜릿 한 조각도 힘겹게 소화를 시켜야 하는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될 줄이야.


먹을 수 없으니 먹어서 행복했던 그와의 기억이 더 또렷해져 나를 괴롭혔다.

오랜 자취생활에도 제대로 된 요리를 해 먹지 않았던 나에게 건강한 요리의 중요성을 알려줬던 게 그 사람이었다. 환경운동가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제철 재료로 해 먹는 건강한 음식을 매 끼니 챙겨 먹었던 그였다. 그 덕에 나도 그를 만날 때마다 직접 해주는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음식을 먹는 호사를 누렸었다. 내게 먹이겠다고 텃밭까지 가꾸며 정성을 들였던 그 마음은 어디 가고 이렇게 먹지도 못하는 고통만 남겨두고 떠났을까?


그와 헤어진 후 함께 먹었던 음식을 만날 때마다 차마 입에 대지 못하고 눈물 지었었는데 지금은 먹고 싶어도 몸이 거부를 하고 있었다. 먹고 싶은 만큼 다 먹어치울 수 있는 커다란 위와 충분한 돈이 있었음에도 가는 길마다 있는 공용 수도에서 공짜로도 마실 수 있는 물조차 실컷 마실 수 없는 처지라니. 지금의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갈증을 해소해 줄 물 한 모금, 최소한의 칼로리 보충을 위한 초콜릿 한 조각이 전부였다. 먹고 싶은 건 차치하고라도 ‘먹는 행위’라도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새삼 몸에게 미안했다.



배가 고파도 먹을 수 없게 된 지 나흘 째 되는 날.

같이 길을 걷게 된 바오로 신부님이 바(Bar)로 나를 데려가 의자에 끌어 앉혔다. 이대로 계속 걷다간 큰일 난다며 조금이라도 먹을 수 있도록 처치를 내려주시겠다고 했다. 신부님은 배낭 깊숙한 곳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더니 내게 손을 달라고 했다.


“손은 왜요?”

“침놔줄게.”


침이라니. 상상도 못 한 재료(?)였다.

위경련을 치료해 주겠다고 배낭에서 꺼낸 건 수지침이었다. 혼자 사는 데 도가 튼 신부님은 병원에 가지 않아도 아픈 델 빠르게 낫게 하는 방법으로 ‘수지침’ 놓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혹시 몰라 가져왔다는 수지침을 나를 위해 처음 공개한 것이었다. 제법 전문가다운 포즈로 수지침 하나하나를 알코올로 정성껏 소독하고 침놓을 준비를 마친 신부님은 내 왼손 장지 끝에 첫 시침을 하셨다.


“으악!!!!”


시침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주위에 있던 외국인들이 신기한 구경거리를 보러 우르르 몰려들었다. 두 번째 침이 손바닥 중앙에 꽂혔을 땐 차마 소리를 지를 수가 없어 오른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신부님과 나를 가운데 두고 몰려든 외국인 순례객들은 총 25개의 침이 내 왼손에 꽂히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며 때론 같이 비명을 지르고, 찡그리고, 웃었다. 가히 압도적이었던 호러 장면은 침을 뺌과 동시에 몽글몽글 흘러내린 검붉은 피를 다 같이 목도하게 되었을 때다. 침을 맞은 내가 봐도 끔찍하게 검은 피였다. 그들은 그 시술 장면을 감상하는 데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고, 궁금한 걸 묻지도 않았다. 그렇게 시작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키더니 내 손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오자 뭔가 해결됐다는 걸 느꼈는지 박수를 치며 함께 기뻐했다.


잠깐의 시원함이 있었을 뿐 수지침도 큰 효과를 거두진 않았지만, 아픈 걸 낫게 하기 위해 침을 놓아준 바오로 신부님과 나았을 거라고 믿으며 기뻐해준 외국인 친구들 덕에 그날 하루는 기운 내서 씩씩하게 걸었다. 여전히 먹지 못했고 여전히 아팠지만 아픈 걸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 외롭지 않았다. 다만, 아프니까 받을 줄만 알았지 사랑을 퍼주던 나를 만날 수가 없었다. 주는 것만으로 충분했고 받으면 그만큼 더 주었는데 주는 걸 잊어버린 사람처럼 받고만 있다.


눈으로만 먹어야 했던 스페인의 요리들




사랑과 이별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자꾸만 생각나고 자꾸만 보고 싶다. 세상이 온통 그 사람으로 가득하다.

잊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세상 모든 게 그와의 추억으로 각색되고, 그럴수록 더 생각나고 보고 싶어 진다.

한창 사랑을 할 때와 다른 건 그가 곁에 없고, 잊으려고 애쓴다는 사실뿐이다.


그와 헤어지기 위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지만

그와 헤어지려고 할수록 그와 가까워지는 걸 느낀다.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 말고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사랑하는 동안엔 이별할까 두렵더니

이별하는 동안엔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되짚게 된다. 그래도 계속 헤어지다 보면… 진짜 이별을 할 수 있겠지?


비어버린 사랑의 공간이 그가 주었던 것만큼 채워지면 다시 그가 없었던 나로, 받은만큼 줄 수 있는 나로 돌아갈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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