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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 Oct 18. 2024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이라고 길이 아닌 건 아니니까!

어디로 가도 길은 있으니 안심해도 돼

당연한 길이었다.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는 길. 누구나 가는 길이었기에 나도 그 길을 걷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길이 나에게만 당연하지 않은 길, 낯선 길이 되었을 때 가슴이 허하고 멍했다.


난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메세타 Meseta 평원을 걷고 있으면 세상엔 딱 세 가지만 존재한다고 믿게 된다.

밀밭과 구름 그리고 나.

끝없이 펼쳐진 샛노란 밀밭과 거대한 자태로 하늘을 평정한 구름이 만나는 곳에 배낭을 멘 작은 내가 서 있다. 그게 전부다.

부르고스 Brugos에서 레온 Leon까지 이어지는 대평원 180km.

그늘도 없고 마을도 보이지 않는데 물통의 물은 10km 지점에서 벌써 바닥났다. 따가운 햇볕 아래 보이는 거라곤 길, 길, 길... 하루도 안 돼서 이렇게 지쳤으니 앞으로 일주일을 어떻게 버텨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그나마 젖은 양말을 바짝 말릴 수 있겠다는 한 가지 희망을 위안 삼아 걷고 또 걸었다.

길을 걸으며 유일하게 나침반이 되어주는 노란 화살표는 언제부턴가 보이지도 않았다. 하긴 갈림길이 없으니 굳이 화살표를 그어놓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도에 의지해야 하는데, 도대체 지도에 표시된 거리가 미덥지가 않았다. 지도대로라면 한참 전에 마을이 나왔어야 하는데 마을은커녕 삐쩍 마른나무 한 그루도 보이질 않으니...

위경련으로 먹을 수 있는 거라곤 물뿐인데 그것마저 똑 떨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 한 모금, 아니 한 방울이라도 좀 달라고 할까? 하지만 무겁게 지고 온 물을 날름 얻어 마시기도 미안해 타들어가는 목구멍을 마른침으로 달랬다. 손가락 하나라도 감춰줄 그늘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구차한 생각을 안 했을 텐데... 스스로를 비난하고 채찍질하기를 반복하던 난 언제부턴가 앞서가던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마침내 그들이 사라진 곳 가까이에 도착한 난 눈이 번쩍 뜨였다. 그곳엔 작은 웅덩이 같은 마을이 있었다. 오아시스처럼 ‘뿅’ 하고 나타난 마을은 천국과도 같았다. 걸은 지 33km만에 신기루 같은 혼타나스 Hontanas에 도착했다.

메세타 평원 한가운데 콕 박힌 마을 혼타나스


오아시스로 사라진 사람들을 만나는 순간의 감격은 뭐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먹지도 못하고 걸었던 뜨겁고 괴로운 여정을 단숨에 잊기에 충분했다. 더불어 다음날 걷게 될 길을 체크하는 여유까지 생겼다. 내일 가야 할 길은 오아시스를 다시 거슬러 올라와 오른쪽 길로 가는 것이었다. 밀린 일기와 더불어 내일의 일기까지 다 써낸 느낌이 이런 것일까?

하지만 길치의 운명은 미리 쓴 일기마저도 잘못 쓴 일기로 만들었다.

벌써 보름이었고 익숙해질 만한 시간이었고 화살표만 따라가면 되는 너무나 당연한 길이었다. 하지만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20분을 걸어 도착한 곳은 어젯밤 묵었던 알베르게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다. 가야 할 곳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 화살표도 없는 엉뚱한 언덕 위로 올라간 것이다.


또... 길을 잃었네.


새벽 4시. 아직 어둠에 갇힌 마을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의외로 밝은 게 이상해 하늘을 올려다봤다. 거대한 별 하나가 잘게 부서져 흩어진 것처럼 하늘을 꽉 채우고 있었다. 별들이 다시 뭉치기 위해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멀리 풍력발전소의 웅장한 풍차들조차 작아 보이게 만드는 신비한 풍경. 길을 잃었다는 걸 잊고 넋을 잃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매일 감상할 풍차들을 시기하는 마음으로 바람의 마을을 온전히 담았다.


길을 잃을 때마다 낯설지만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쏟아질 듯한 별잔치와 승천하는 용처럼 밝은 기운을 뿜었던 여명까지 그날의 아침은 아픈 나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날 같았다.


남들이 다 가는 길로 갔으면 보지 못했을,
길을 잃지 않았으면 그저 똑같은 하루였을,
어디로 가도 길은 있으니
안심해도 된다는 위로!


그 날의 아름다운 여명




화살표에 의지해서 걷다 보면 화살표가 없는 길은 길로 보이지 않았다. 그 길은 내가 가서는 안 되는 길, 방향이 잘못된 길로 여겨졌다. 남들이 다 가는 길로 가는 게 옳은 길, 맞는 길, 이상하지 않은 길이었다.


그 당연한 상식을 깨부수듯

나도 모르게 들어선 화살표가 없는 길은 ‘그 길도 길이다’라는 걸 알려주었고, 뜻밖의 선물로 나를 기쁘게 했다.


남들이 가지 않는다고 길이 아닐까?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 주는 화살표라는 이정표가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조차도 길은 열려 있었다.


사랑을 잃었다고 길을 잃은 건 아니니까.
길을 잃었다 해도 또 다른 길로 가면 되니까.


목적지로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고,
각자가 정하는 방향이 새로운 길이 되는,
낯설고 이상하지만,
나만이 갈 수 있는 독특한 길로 가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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