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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 Oct 25. 2024

혼자가 된 줄 알았는데 비로소 나 자신이 된 게 아닐까

벅벅벅, 몸과 마음의 허물을 긁어내고

걷는 동안은 혼자였지만,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서부터 알고 지낸 몇몇 한국인들이 항상 모여 장도 보고 같이 식사를 하고 그날의 여정을 나눴다. 그래서 좋았고 그래서 불편했다. 혼자가 아니어서 좋았고 혼자일 수 없어서 불편했다.


대평원의 마지막 지점인 레온 Leon에서부터였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각자의 페이스에 맞춰 걷고 알베르게에서도 만나지 말자고. 산티아고순례길에 오른 각자의 사정과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좋겠다고.


그렇게 혼자만의 걷기가 시작됐다.




왜 이 길을 걷게 됐는지 되짚어봤다.

단지 파혼 후의 상처만을 치유하고 다독이기 위함이었을까? 그것만이 이유라면 꼭 이곳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산티아고 가는 길 Camino de Santiago


이 길을 걸으면 내가 지은 모든 죄를 속죄받는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무슨 죄를 지었지? 죄라면 버림받은 내가 아니라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지은 것 아닌가?


내 안의 두 목소리가 누구의 죄가 더 큰지 다투는 동안 혼자만의 하루가 지나갔다. 종일 혼자 걷고 도착한 알베르게엔 낯선 이들로 가득했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했고 내가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곳. 그와 처음 헤어졌을 때처럼 내 편이 모두 사라진, 갑자기 이상한 나라에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혼자이고 싶다고 했지만 그 사이에 같이 걷는 동료들에게 많이 의지했었다는 걸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동안은 헤어진 그를 정리하는 시간이었다면 남은 길을 걷는 동안은 나만을 위해서, 진짜 나를 찾기 위해서 시간을 할애하겠다고 다짐한 이상 이보다 좋은 조건은 없었지만 그들의 따뜻함으로 버텨왔기에 그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위경련은 여전했기에 못 먹으며 걷고 물로 허기를 달래는 날이 지속됐다. 그래도 다리에는 근육이 붙었는지 걷는 게 훨씬 수월해졌다. 하루에 25km가 아니라 30km를 걸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날도 그랬다.


30km를 걷고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며칠간 이유 모를 가려움증으로 온몸을 긁어댔던 게 신경 쓰여 샤워실로 갔다. 팔다리와 목 언저리에 반점들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마치 수십 대를 얻어맞은 사마귀처럼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위태한 모양으로. 그 유명한 베드 벅스(bed bugs)에 물린 것도 모르고 며칠을 가렵다고 벅벅 긁어댔던 것이다. 툭 터져 고름이 주르륵 나올 것처럼 징그러운 것들이 내 몸, 그것도 옷으로 가려지지도 않는 곳에만 덕지덕지 붙어있으니 누구든 보면 피부병 환자로 오해하고 피해 다니기 딱 좋은 상태였다.

며칠 전만 해도 나를 도울 친한 동료들이 있었지만 이제 아무도 없고 혼자서 처음 겪는 이 난관을 해결해야 했다. 딱히 뭘 해야 할지 방법은 떠오르지 않고 피로는 몰려오고 해서 마당으로 나가 파라솔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감았다. 침대에서 편히 못 자는 신세가 처량했지만 도저히 베드 벅스가 있을지도 모를 침대로 갈 수가 없었다.

“올라(Olla)!"

익숙한 인사에 눈을 떠보니 외국인 아줌마가 내 얼굴 아래쪽, 그러니까 목 언저리의 벌건 사마귀 자리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Are you ok?"

그리 괜찮진 않았지만, 괜찮다고 했다. 그러자 믿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오른손으로 목을 긁는 시늉을 하며 “벅벅벅?”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아줌마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벅벅벅, No! No! 베드 벅스... 벅벅벅, No!"

하며 스페인어로 뭐라고 부연설명을 한다. 뒷부분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번엔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똑같이 목을 긁는 시늉을 하고 이어 ‘No!'라고 단호하게 말해줬다. 긁지 않겠다는 표현으로.

 "Whe... Where is your... bed?"

더듬거리는 영어로 내 침대가 어디 있는지 묻는 스페인 아줌마. 왜 묻는지 물어볼 경황도 없이 아줌마는 내 손을 잡고 같이 가자고 했다.

그 후의 상황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내 배낭을 뒤집어 그 안에 있는 걸 몽땅 끄집어내더니 옷가지는 빨래 통에, 침낭과 배낭은 탁탁 털어 빨랫줄에 널었다. 침대에도 어느새 하얀 시트를 깔아줬다. 그리고 어디서 가져왔는지 하얀 가루를 내 몸에 뿌려줬다.


난데없이 나타난 천사가 ‘벅벅벅’ 내 몸과 내 짐을 씻어줬다. 3주 가까이 걸으며 묵었던 때가 한순간에 말끔히 씻겨 내려간 것 같았다. 내 안에 묵었던 모든 죄와 허물까지도 긁어낸 듯 시원했다.


그렇게 나를 감동시켜 놓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할 틈도 주지 않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 스페인 아줌마.


나는 누군가를 대가없이 도운 적이 있었나?
누군가에게 고마운 이정표가 되어준 적은?
사랑, 에 눈이 멀어 나 자신을 잃었던 건 아닌가?


‘벅벅벅’ 베드벅스의 흔적도, 내 죄와 허물까지도 날려버린 그 날




혼자이고 싶었지만 혼자인 게 싫었는데, 나만 혼자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언제든 나를 도와주고 갈 길을 잃은 내게 이정표를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어쩌면 그와 헤어지고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고 생각했던 게 착각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난 혼자가 된 게 아니라 비로소 나 자신이 된 게 아닐까?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도움받을 수 있고 누구와도 가까워질 수 있는 온전한 나 자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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