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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 Nov 08. 2024

이제부터 나는 ‘채울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한다

사랑하는 그를 완전히 보내고 나서야 온전히 나를 찾게 되었다

그와의 이별이 그렇게 힘든 일일 거라고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를 잊으려 그립고 보고 싶은 슬픔을 억지로 삼키고 참아야 하는 것보다, 사랑했던 그가 나라는 사람을 지우고 살아갈 거라는 사실이 더 마음 아팠다. 그래서 더욱 그를 잊기 위한 센 처방이 필요했다.


다행히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으며 그 처방의 쓴맛을, 그 뒤의 달콤함을 맛볼 수 있었다.




800km 여정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la에 도착했다. 출발한 지 25일 만이었다.


걷는 게 익숙하지 않아 하루하루를 그야말로 버티기로 걸었는데, 열흘이 지나 좀 걸을만한 때부터 몸살에 위경련까지 겹쳐 보름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꾸역꾸역 그 먼 길을 걸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도착했음을 알려주는 상징적인 장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앞에 가자마자 광장에 드러누워 하늘을 봤다. 늘 아름다웠지만 성당의 뾰족한 탑과 어우러진 파란 하늘은 유독 눈이 부셨다. 이윽고 눈이 따끔해지더니 눈물이 고였다.


산티아고 완주 증명서를 발급받으면서, 장엄한 대성당의 미사 중 완주자의 이름 하나하나를 불러주는 신부님의 목소리로 내 이름을 들으면서 또다시 감격의 눈물을 흘렸지만, 무엇보다 배가 너무 고팠다. 그동안 못 먹었으니 배고픈 게 당연했지만 어쩐지 그날만큼은 뭐든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성당 근처 바 Bar로 가서 그렇게나 먹고 싶었던 스페인의 문어요리 뽈뽀 Pulpo와 맥주를 시켰다. 어차피 더 이상 걸을 일도 없으니 위가 아프더라도 한 끼는 제대로 먹고 싶어 음식이 나오자마자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다. 맥주의 힘을 빌어 문어를 꿀떡꿀떡 삼켜 먹은 지 5분 만에 눈앞에 빈접시가 보였다. 며칠 굶은 거지처럼 순식간에 먹어치운 것이다. 먹으면 30초만 지나도 위가 꼬여 물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었는데 거짓말처럼 통증이 없었다. 수프도 죽도 아닌 문어를 씹어 삼켰는데도 말이다.


이래저래 눈물 나는 날이었다.
드디어 먹을 수 있는 날이 오다니.
이 달콤함을 이제야 맛보다니!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도착하자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먹고 힘을 내 산티아고 가는 길 0km 지점이 있는,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피니스테레 Finisterre에 갔다.


800km에서 0km까지!


먼 길을 돌아 간 그곳에서 25일간 내 속에 가득했던 많은 생각의 잔재들을 불태웠다. 끝도 없이 나를 괴롭혔던 헤어진 그와의 추억과 미련을 태워버리고, 혼자서 살아갈 날들에 대한 걱정을 태워버리고, 몸으로 아프면서 마음의 상처를 이겨낸 고통스러운 날들을 태워버렸다.


사방이 하늘과 바다로 둘러싸인 피니스테레의 등대 아래 언덕에 앉아 있으니 모든 걸 태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태우고 난 텅 빈 마음의 공간이 얼마나 가볍던지.


텅 비었으니 이제 채우기만 하면 되었다.


이제부터 무엇으로 채울지, 그것만 생각하자고.

사랑을 잃었다고 슬퍼했지만 길 위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진짜 사랑을 배웠으니 되었다고.

나를 한층 성장하게 해 준 그 시간들에 감사하자고.


작고 큰 다짐들을 하며 언덕을 내려왔다.

오늘부터 나는 ‘채울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거다. 온전히 나로 살아가는 거다.


0km에서 나도 0이 되었다. 텅 비어서 채울 수 있는 나.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를 스페인으로 보낸 신부님이 한 달 전에 보낸 이메일을 확인했다. 그분이 길을 통해 내가 무엇을 얻길 바라셨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다 잃었다고 생각했던 내가 오히려
더 잃을 게 없어 충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각자의 삶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향한 길이 아닐까?
온전히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그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누군가와 더불어 살지 못할 때
그 누군가를 향한 마음의 찌꺼기들을 쏟아내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진실되게 만나고
그 당당함으로 그 누군가와 만났는지를
앞서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언제나 여행은 자기 자신을 향한 길이다.

그 여행의 길은
처음 물음표로 가득한 마음으로 떠나고
그  길 안에서 느낌표를 만나고
새로운 시작을 향한 마침표를 찍고 돌아오는 일이다.

누군가를 향해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 떠나가는 길이며
참된 자기 자신으로 당당하게 되돌아오는 길.
그 길의 목적지는 '나' 자신일 것이다.

그 멋진 삶을 준비하고 떠날 수 있는 시간 앞에 선 사람은
아픔과 슬픔이 있더라도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 아픔과 슬픔은
최선을 다해 살아낸 참된 '나' 자신을
진실되게 만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일 테니까...

뜨거운 저 태양보다 더 뜨거운 삶을 살아라!
지금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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