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주는 위로-글쓰기 예찬
창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일까?
창작을 하는 사람은 어딘가 남다르고 뛰어나고 독특한 발상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아무나 창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특권을 지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그들만의 세계.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작은 그래서 어렵고 험난한 길을 걷는 일이다.
마침내 길 끝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창작품을 세상에 처음 내보이는 일은 엄청난 부담감과 두려움을 동반하기에, 창작을 하는 사람은 무대에 오르긴 전 가장 두껍고 단단한 착장이 필요한 배우가 되어야 한다. 창작보다 더한 고통이 있더라도 착장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창작은 새로움을 창조하는 일이다.
창작은 새로운 시도를 하는 일이다.
창작은 새로운 시각을 갖는 일이다.
그동안 없던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인고의 과정을 겪다 보면 이 고통의 끝에는 과연 희열이 있을까, 고통이 끝나긴 할까 의심하게 된다. 고통이 반복되고 희열의 때가 오지 않으면 창작자는 동굴 속에서 길을 잃고 한줄기 빛을 찾아 헤맨다.
다행인 건 한줄기 빛을 볼 수 있길 기다리는 동안에도 창작을 멈추지 않는다면, 기다리던 출구는 아니어도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빛을 닮은 무언가를 만나게 된다. 그 무언가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내면과 만나는 시간.
처음부터 그 무언가가 빛을 발하지는 않는다. 그 민낯을 마주하고 대화를 시도하려 해도 낯을 가리고 묵언수행 하듯 대화를 꺼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단단한 문을 마침내 열게 되면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 자기 자신과 더 깊이 더 오래 대화할수록 보이는 세상의 범위도 넓어지고 구체화된다. 빛을 만끽하며 창작을 이어갈 힘이 생긴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이 끝났다고 여길 무렵 또 다른 무언가를 만나게 되는데, 또 다른 무언가도 역시 ‘자기 자신’이다. 하지만 이번 무언가는 더 깊숙한 곳에서 더 오래 숨어 있던 무의식이라는 소위 ‘꼴통 도사’다. 그는 창작품을 내놓은 이후에도 종종 찾아오는 집요하고 끈덕진 성질머리를 갖고 있어 창작자를 애먹이고 창작품에 찬물을 끼얹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만남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그야말로 창작에 꽃을 피우는 핵심 비결이 그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줄 듯 말 듯 혹은 줬다 빼앗기를 반복하는 그의 줏대 없는 행동이 얄미워도 어쩔 수 없다. 창작은 무의식과의 악수에서 시작되니까.
드디어 진짜 빛을 만나게 되어 창작품을 가지고 동굴 밖으로 나가게 되면 아름다운 세상과 조우할 것 같지만 더 사나운 놈들이 창작자를 노려보고 있다. 할퀴고 물어뜯고 빼앗고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드는 맹수들. 그들과 맞서기 위해서 창작자는 반드시 착장을 해야 한다. 착장은 두껍고 단단할수록 효과 만점이다. 착장을 도와주는 사람은 없느냐고 묻겠지만 착장은 오로지 창작자의 몫이다. 동굴 속에서 이미 만들어 놨다면 살짝만 걸쳐도 맹수들의 공격에 끄떡없겠지만 창작만 하느라 착장을 소홀히 했다면 동굴을 나갈 출구가 코앞에 있더라도 착장이 완성될 때까지 대기해야 한다.
창작보다 더한 고통이 착장을 만드는 일일 수 있음을 꼭 기억해야 한다.
착장은 스스로를 단련하는 일이다.
그 누구의 비난이나 비평에도 굴하지 않을 자기만의 방어벽을 만드는 일이다.
창작품이 오염되거나 빼앗기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방호복을 입는 일이다.
창작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착장은 그래서 두껍고 단단할수록 힘을 발한다. 빛을 봐야 할 창작품이 소홀한 착장으로 인해 다시 동굴로 들어가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몇 년 만에 혹은 몇 십 년 만에 세상에 나온 창작품이 맹수들에게 물어뜯겨 사라지면 안 되니까.
창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착장이 준비되지 않은 창작은 무의미하기에 어찌 보면 창작은 아무나 할 수 없다. 험난한 길을 헤쳐나갈 창작용 착장으로 무장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만이 창작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창작품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창작자 본인 뿐이니까!
[지금 연재 중입니다]
월 : 어른의 Why?
화 : 일주일에 한번 부모님과 여행갑니다
수 : 어른의 Why?
목 : 글이 주는 위로-글쓰기 예찬
금 : 영화보다 드라마틱한 사ㄹㅁ
토 : 어른의 W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