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주는 위로-글쓰기 예찬 2
작가는 우렁찬 목소리보다는
작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자신 없는 음성으로 낮게 읊조리는
소심한 목소리에
삶의 깊은 진실이 숨어 있을 때가 많다.
그런 웅얼거림을 잘 들으려면
발화자 가까이에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작가라는 직업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나는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말에 대해 궁금했다.
엄마와 나의 대화를 눈빛으로만 따라오는 아빠의 숨겨진 말, 정신없이 수다를 떨다가도 어느 순간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친구의 보이지 않는 말, 회사의 부당함에 적극적으로 앞장서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이들의 웅얼거림이 궁금했고 그들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무언지 끄집어내고 싶었다.
독심술을 쓰거나 인터뷰를 하지 않는 한 그들이 말하지 않는 말을 알아들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처음 택한 방법은 ‘넘겨짚기’였다.
‘이런 마음일 것이다 ‘, ’이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닐까?’하고 넌지시 물으면 “귀신 같이 어떻게 알았냐?”, “그래도 내 맘 아는 건 너뿐이네.”, “그게 아니라 이런 거다.”, “말하고 싶지 않다.” 등의 반응이 되돌아왔다. 그런 작업이 여러 번 반복되고 쌓이다 보니 독심술에 가까운 재주(?)가 생겼다.
처음엔 넘겨짚기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이 감추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되었고, ’ 내가 묻기 전에 어서 말해!‘라는 내 눈빛을 읽기라도 한 듯 알아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렇게 가족과 친구, 지인들의 말하지 않는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들을 통해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사람들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늘 뒤에 감춘다는 것이다. 한 시간 내내 쉴 새 없이 떠들어대도 그 사람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동안 쏟아낸 말들이 아니라 허공을 바라보는 눈빛, 방황하는 손가락, 배배 꼬는 다리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몸으로 보여준 말이 백 마디 목소리보다 더 크게 울렸다.
말하지 않는 말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에 집중해야 했고 그의 비언어적 행동을 유심히 관찰해야 했다. 그러지 않고는 독심술이 통하지 않고 그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아챌 수가 없었다.
상대방의 말에 깊이 공감해 주고 그들의 수다를 경청하고 말하지 않는 말까지 알아채는 나는 가끔 피곤하기도 하지만, 그런 수고를 덜어내고 싶은 내 속의 투덜댐을 작가라면 마땅히 거쳐야 할 절차라는 명목으로 일축해 버린다. 보이지 않는 말로 그들을 위로하고 글로 써낼 수 있어 기쁜 마음이 더 큰 것이 사실이다.
일부러, 애써, 기꺼이, 말하지 않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작가여야 한다.
들릴 듯 말듯한 작은 목소리와 웅얼거림, 몸짓, 눈빛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작가여야 한다.
그 말을 알아들음으로써 그들의 손을 잡고 한 편이 돼 줄 수 있는 사람이 작가여야 한다.
글을 쓰는 나조차도 글 속에 말하지 않는 말을 쓰곤 한다.
‘이렇게 쓰면 들키지 않겠지.’ 했는데 그걸 귀신같이 알아채는 독자가 있으면 움찔한다.
돌려 말했는데 단번에 알아듣는 독자가 있으면 고맙다.
그렇게 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말하지 않는 말을 들어주는 작가가 돼 줄 수 있다면 좋겠다.
말하지 않아도, 작게 웅얼거려도 귀 기울여주는 작가가 돼 줄 수 있다면!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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