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행복한 날은 없는 것처럼
엄마를 건너뛰고 할머니가 된 나는 손녀들-조카의 딸들-을 보면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결혼한 적 없어 낳아본 적 없는 자식을 향한 마음이 얼마나 크고 대단한지 잘 모르는데도, 조카의 딸이 나를 ‘할미‘라고 부르며 쪼르르 달려와 자기가 먹던 과자를 내 입에 넣어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그래서 조카에게 “넌 행복하겠다”라고 말하면 “행복하긴. 이모가 몰라서 그래. 난 매일 힘들다구.”라고 투덜거린다.
딸을 꼭 껴안고 뽀뽀하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행복을 느끼기보다는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아달라고 말하는 조카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저렇게 예쁜 딸들과 아내밖에 모르는 남편이 있는데도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조카뿐만 아니라 결혼한 친구들을 만나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자식과 남편에 대한 불평과 험담이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힘들고 불행한지를 토로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말 안 듣는 자식과 너무 달라 맞지 않는 남편 때문에 겪는 여러 에피소드의 결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이다.
주는 만큼 받지 못한 사랑 때문에 투덜대면서도 그들의 존재 자체가 주는 행복에 젖어 있는 게 느껴진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사소한 것에서 오는 불만족과 서러움을 토로하느라 그들에게서 충전한 사랑을 잠시 잊고 있다가도, 이미 자신의 삶 일부가 된 그들이 사라질까 두려워한다.
내가 혹여 그들에 대한 험담에 동조하면, 자기는 그럴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헐뜯는 건 못 참고 도리어 나를 공격한다.
경험이 없는 나는 그저 친구의 편을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져보지 못한, 누려보지 못한 엄마와 아내라는 자리에 있어보지 못한 게 후회되기도 한다.
저렇게까지 감싸고도는 자식과 남편이라는 존재에게 내가 가진 것을 어느 정도까지 쏟아부을 수 있는지 모른다는 게 아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얼마큼 사랑이 깊어야 그렇게까지 마음 한편을, 어쩌면 전부를 내줄 수 있는지 궁금하다.
그러면서도 불행하다고 말하는 친구들에게 “어떻게 하면 행복할 것 같아?”라고 물으면 10명 중 9명은 “혼자 있으면 행복할 것 같다.“고 말한다.
자식과 남편에게 신경 쓰고 마음 쓰는 게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서 좀 떨어져 지내면 행복할 것 같다고.
잠깐 여행이라도 갔다 오라고 부추기면 “애 밥은 누가 챙겨주냐, 남편이 나 없으면 잠을 못 잔다” 등의 핑계를 대며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간다.
그녀들의 험담과 투덜거림은 결국 사소함에서 오는 잠깐의 통증에 대한 호소일 뿐인 걸까?
불행하다고 느끼는 건 행복이 떠나서가 아니라 행복이 사소한 것들로 떠난 걸 모르기 때문인 걸까?
나의 나날이 고통스러운 것은
사랑이 떠나서가 아니라
사랑이 사소한 것들로 떠나서다.*
나의 나날이 고통스러운 것은
행복이 떠나서가 아니라
행복이 사소한 것들로 떠나서다.
내가 가진 것, 누리고 있는 행복은 작게만 느껴지나 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 거라고 혹은 행복이 떠난 거라고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행복이 떠나서가 아니라
행복이 사소한 것들로 떠나서는 아닌지
사소한 것에 마음을 빼앗겨 행복을 만끽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좋겠다.
가져보지 못한, 누려보지 못한 나에게는 보이는 행복이
정작 행복 안에 있는 이들에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행복하면서 불행한 아이러니를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에서 미국의 시인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의 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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