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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당신이 내 이야기를 들어준 덕분에

덕분에, 살았습니다

by 다시봄

진흙이 질척이는 길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털어도 계속 늘러붙는 진흙 위를 걸으면 한 걸음을 떼는 것이 ‘이렇게나 힘들구나’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신발 바닥에 겹겹이 붙어 무게를 더하는 진흙은 어느 순간 늪이 되어, “조금 더 내려가 보라”며 나를 아래로만 끌어당긴다.


하지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 싸움도 어느 순간 어김없이 끝난다.

툭!

신발에 달라붙어 있던 진흙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거나 어딘가에 걸려 떨어져 나가는 순간, 허전할 만큼 가벼운 발걸음이 돌아온다.

그때서야 깨닫는다.

적당히 마른 흙길, 평평한 콘크리트 바닥, 그리고 그 위를 걷게 하는 멀쩡한 신발이 얼마나 고마운 것들이었는지를.





덕분에, 살았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던 남자친구가 전화로 이별을 통보했을 때, 나와 우리 가족은 이미 다른 진흙탕을 지나고 있었다.

작은언니의 아들이 혈액암으로 입원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한 번 크게 무너진 가족들에게 파혼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겨우 사흘 만에 몸무게가 3kg이나 빠졌고, 사람과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 만큼 괴로웠다.


헤어진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나는 도무지 참기 힘든 충동을 느꼈다.

그날은 원래 해외에서 일하던 그가 나와 결혼하기 위해 입국하는 날이었다.

‘공항으로 가야 할까? 만나서 이야기하면 달라질까? 전화라도 오면 뛰어가야지.’

그런 상상을 하며 연락을 기다렸지만, 그의 전화는 끝내 오지 않았다. 이별을 통보받던 순간보다 더 깊은 구멍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픈 조카 앞에서, 눈물 고갈된 작은언니 앞에서, 나의 실연은 사소해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이성의 잣대로는 털리지 않았다. 그저 너덜너덜한 몸과 마음으로 회사에 가기만 해도 하루가 버거웠다.


점심시간, 혼자 있고 싶어 회사 근처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인적이 드물어 통곡을 해도 아무도 눈치채지 않을 것 같은 곳.

벤치에 홀로 앉아 복잡하게 엉킨 마음을 쓸어내리고 있을 때, 옆에 누군가가 조용히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방해받고 싶지 않아 일어나려는데 그 사람이 나를 불렀다.


“언니, 괜찮아요?”


밥도 먹지 않는 내가 걱정되어 따라왔다는 생산팀의 여직원, 정이였다.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서 일하면서도 말 한마디 섞어본 적 없던 사람이었다. 아무도 관심 주지 않는 회사에서, 유일하게 나를 보고 있던 단 한 사람이었다.

나는 이유도 모른 채 그녀 앞에서 무방비가 되었다. 묻지도 않은 내 이야기가 앞뒤 없이 터져나왔다.

정이는 내 손을 잡아주기도 하고, 내 어깨를 천천히 두드려주기도 하며, 가끔 아주 짧게 말했다.


“음… 그랬구나.”


그녀는 조언하지 않았고 결론을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저 온전히 들어주었다.

말없이 나를 가만히 받아주는 그 자세가, 나를 꽉 묶고 있던 진흙 덩어리를 조금씩 떼어내기 시작했다.


그날 집에 돌아와 불을 켜는 순간 낮보다 마음이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다는 것이 이렇게 큰 힘이 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녀에게 털어놓고 나서야 부모님께도 솔직히 이야기할 용기가 생겼다.

2주 만에 파혼 소식을 전하자 부모님은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다. 오히려 해외에 나갈 막내딸을 걱정하고 계셨다며 “잘됐다, 괜찮다”고 말씀하셨다.

병원에 있던 언니도 나를 먼저 걱정해주었다. 말하고 나니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다.


그날 정이가 내 말을 들어준 덕분에 흔들리던 하루가 제자리를 찾았다.

그녀 덕분에 나는 그때 무너지지 않았고, 그녀 덕분에 삶을 다시 붙잡을 수 있었다.

그저 내 이야기를 들어준 것뿐인데, 진흙처럼 늘러붙어 나를 끌어내리던 무게가 툭 하고 떨어져 나갔다.

진흙을 털어내고 나서야 곁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그들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날, 그녀 덕분에,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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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글이 주는 위로-글쓰기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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