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살았습니다
눈밑 점막만 봐도 빈혈 여부를 알 수 있다며, “어지럽다고 다 빈혈은 아니다”라고.
그래서 ‘어지럼증’이라는 진단명과 함께 일주일치 약을 처방받았지만,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벌써 한 달째 어지럼이 이어지고 있다.
잠을 제대로 못 자고 과하게 일하던 20대 중반, 서 있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빈혈이 심해 6개월간 철분제를 먹었던 적이 있었다.
최근에도 이른 새벽에 깨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 불규칙한 수면 때문인가 싶으면서도, 여러 원인이 겹칠 나이라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의사는 차트를 넘기며 약을 바꿔야겠다 말했다.
“혈액 검사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동네 ‘명의’인 의사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이 병원에 왔을 때는 내가 그 표정을 지었었다. ‘저 분이 진짜 의사 맞나?’ 하는.
마르고 검게 그을린 얼굴, 짧게 깎은 스포츠머리. 의사라기보다는 중년 나이트를 관리하는 아저씨 같은 인상.
그런데도 어느새 스무 해 넘게 그가 내 건강을 도맡고 있다. 내과부터 외과, 소아과, 부인과까지 혼자서 거뜬히 보는 동네 사람들이 인정한 명의이기 때문이다.
“혹시 모르니 혈액 정밀 검사 해보고 약 다시 처방할게요.”
“근데… 지금도 선생님 얼굴이 살짝 흔들려 보여요.”
의사는 내 눈밑을 또 들여다보며 역시 빈혈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갸우뚱했다.
이틀 후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빈혈이네요. 내원해서 약 처방 받아가세요.”
사무장의 건조한 말투를 듣고 전화를 끊자마자 웃음이 났다.
빈혈이라는 말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의사가 뭐라고 할지 생각하니 하루 종일 미소가 지어졌다.
다음날 아침, 출근 전 병원으로 향했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의사는 의자에 앉을 틈도 주지 않고 말했다.
“그래요?”
“혈색소 수치가 12에서 16이 정상인데 9가 나올 정도면 얼굴에 핏기가 없어야 하거든요. 근데 혈색이 너무 좋아서 아닌 줄 알았죠.”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의사는 어떻게든 자신의 ‘관상 진단’이 틀린 건 아니라는 듯 설명을 이어갔다.
“이 정도면 빈맥, 어지럼증에 식욕저하도 오고, 살도 좀 빠지고…”
“근데요, 선생님. 저는 왜 식욕이 하나도 줄지 않고, 먹고 싶은 건 더 많고, 살도 안 빠질까요?”
“그러니까요. 그게 이상해요.”
의사의 말들이 계속 웃음을 끌어냈다.
몇 십년을 수많은 환자를 보고, 어머니 병을 고치겠다며 약초를 찾으러 전국 산을 다녔다는 사람.
부인과 질환은 박사들도 자문을 구한다는 그 명의가 지금은 조금 당황해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끝내 식욕저하가 오지 않아 혈색은 좋지만, 수치는 분명한 빈혈.
3개월치 철분제를 처방받으면서도 상황이 묘하게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식욕이 있다는 건 큰 병은 아니라는 말이 큰 위안이 되었다.
“3개월 동안 약 잘 챙겨 먹고, 중간에라도 이상하면 바로 오세요.”
“이상이라면… 식욕 저하 같은 거요?”
“네. 하하하.”
문득 생각했다.
처음부터 의사가 “빈혈이네요”라고 했더라면 나는 이렇게 웃을 수 있었을까?
잠시나마 돌팔이처럼 보였던 의사의 오진 덕분에, 여전히 어지럽지만 지금 나는 활짝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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