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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나라에서 받은 호의 한 잔 덕분에

덕분에, 살았습니다

by 다시봄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낯선 나라, 낯선 도시, 낯선 사람.


비행기를 타고 전철을 갈아타며 겨우 이곳까지 왔다.

다음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하루만 머물러야 하는 곳.

여행이 아니라 깊은 상처로 지칠대로 지친 나를 다독이기 위해 훌쩍 떠나온 곳이었다.





TV와 책에서 보던 파리와는 달랐다.

멀리 에펠탑이 보인다는 것 말고는 사람도 거리도 그저 하나의 배경일 뿐.

그 배경 속에 섞이지 못한 나는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내 마음과 상관없이 그들의 일상과 삶이 여기서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도시를 떠돌며 이런저런 상념에 잠겼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배운 프랑스어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봉주르(Bonjour, 안녕), 멕시 보꾸(Merci beaucoup, 고마워)”만 머릿속을 맴돌 뿐,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배는 고팠다. 마지막으로 먹은 게 기내식이었으니 이미 12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언어는 모르지만 밥은 먹어야 했다.


사람이 비교적 적은, 테라스가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이라기보다든 칵테일 바처럼 보이는 내부에 드문드문 손님이 있고, 사장으로 보이는 덩치 큰 외국인이 주문을 기다렸다.

“봉주르” 하고 인사한 뒤 메뉴판을 펼쳤지만, 온통 프랑스어뿐이라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결국 세트 메뉴처럼 보이는 것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주인은 내 어색함을 눈치챘는지, 조폭처럼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귀여운 웃음을 지으며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밖으로 나와 인도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유심히 보는 것 같아 나는 도로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지나가는 차만 바라보았다.

오래 머물 필요 없는 도시라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밥만 먹고 숙소로 돌아가 잠이나 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5분쯤 지나자 사장이 직접 음식을 가져왔다.

채소가 듬뿍 들어간 호밀빵 샌드위치 4개와 감자튀김 한 사발. 양이 많아 어떻게 다 먹을지 잠시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는 쟁반을 내려놓고 식당으로 들어갔다가 한 손에 맥주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청량한 라거 생맥주를 테이블 위에 놓으며 활짝 웃으며 말했다.


“세흐비스(Service)!”

“서비스?”

“위(Oui, 응)“


나는 비정상적으로 큰 목소리로 “멕시 보꾸”라고 인사했고, 사장은 더 환하게 웃으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배가 고팠지만 손은 먼저 맥주를 집어 들었다. 한 모금 마시자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낯선 곳에서 말 한마디 못 하고 움츠러들었던 나,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이방인으로 쭈그러져 있던 나,

실연의 상처를 달래지 못한 채 도망쳐온 나를,

맥주 한 잔이 날려버리는 듯했다.


감자튀김 몇 개와 맥주 한 모금에도 구부러졌던 허리가 꼿꼿해지고 움츠러든 어깨가 펴졌다.

낯선 외국인에게 받은 작은 호의, 사소한 배려 하나가 지구 위의 점 하나 같은, 보잘것없던 나를 다시 세웠다.

그가 보기에도 내가 안쓰러워 보였건 걸까?

상처받은 한 인간을 알아본 걸까?

어찌됐든 낯선 외국인인 나를 일으켜준 그가 고마웠다.


그 덕분에, 그 맥주 덕분에, 그 청량함 덕분에,

그날과 그 다음 날 극기 훈련처럼 시작한 나의 하루가 살아날 수 있었으니까.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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