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살았습니다
예전에도 그랬다.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면 위가 먼저 반응했다. 그 때문에 여러 차례 병원을 들락거렸다. 다행히 최근엔 그 정도로 나를 괴롭히는 스트레스는 없어 위장병으로 병원에 갈 일이 드물었는데, 지난주부터 회사 업무 스트레스라는 검이 내 몸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
두 달 전, 빈혈 오진으로 나에게 웃음을 줬던 의사를 다시 찾았다.
의사라면 당연히 그렇듯, 오랜만에 단골 환자를 만나는 건 반갑지만 어디가 아파서 왔는지 걱정도 될 것이다. 진료실로 들어선 나를 보며 의사는 미소를 짓다가, 내 표정을 살피더니 이내 얼굴이 굳었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선생님, 위가 너무 아파요. 처음엔 등이 아픈 줄 알았는데, 지금은 명치 아래 배가 다 아파요.
최근에 매운 거나 자극적인 거 드셨어요? 아니면 스트레스가 심했나요?
스트레스를 좀 많이 받긴 했죠.
아픈 건 언제부터예요?
일주일 정도 됐어요.
일주일? 그렇게 오래 참았다고요?
이러다 말 줄 알았죠.
아이고… 참을 걸 참아야지. 여기 잠깐 누워봐요.
의사는 간이침대에 누워보라더니 배를 구석구석 눌러가며 통증을 확인했다. 꾹꾹 누르는 손끝에 칼이라도 숨겨둔 건지, 건드리는 곳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오른쪽을 누르며 “여기가 아프면 간”, 그 아래를 누르며 “여기는 맹장”, 다시 아픈 쪽을 누르며 “여기는 위가 아픈 게 맞고요. 등이 많이 아프면 췌장에 이상이 있는 건데,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네요.”라고 진단했다.
자리에 다시 앉은 나는 의사의 말을 그 어느 때보다 경청했다. 장기 위치를 정확히 짚어주니 묘하게 신뢰가 생겼다. 의사니까 당연한 말인데도, 괜히 더 믿음이 갔다.
위가 헐은 것 같아요, 스트레스 때문에. 스트레스받은 지는 얼마나 됐어요?
지난주부터니까 2주쯤 됐네요. 어제는 스트레스받아서 밥도 못 먹었어요.
밥 굶으면 안 돼. 그럼 위도 상하고 머리도 상해요.
머리도요?
나름 농담을 한 것 같아 되물었는데 의사는 못 들은 척 딴소리를 했다.
회사에서 직급 좀 되지 않아요?
나이는 많은데 입사를 늦게 해서 말단이에요. 시키는 대로 다 해야 하는 말단.
아… 말단. 말단이면 그럴 수 있죠.
맞아요. 괴롭히는 놈들이 너무 많아요.
내 말에 옆에 서 있던 간호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잠은 잘 자요?
매일 새벽 두세 시쯤 깨요. 잠 못 잔 지는 좀 됐어요.
신경안정제도 넣어야겠네요. 이거 먹으면 졸리니까 일할 땐 빼고 드세요. 아니, 차라리 먹고 몽롱한 상태로 일하면 스트레스 덜 받을 수도 있고.
네, 하하.
이번에도 간호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 웃었다. 그 웃음이 전염돼 잠시 진료실에 웃음꽃이 폈다.
빈혈은 좀 어때요?
약 먹으면 괜찮다가도 스트레스받으면 갑자기 ‘퐉’ 와요. 어지럼이요.
‘퐉’ 올 수 있어요. 약 남은 거 다 드시고 다시 검사해 봅시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인사하고 나가려는 나를 돌려세우며 의사는 그날의 너스레에 쐐기를 박았다.
스트레스 주는 그놈한테 말해요. 너 때문에 위가 다 헐었다고. 적당히 좀 하라고.
네. 꼭 그럴게요.
이거 가져가고.
의사가 건넨 간이 처방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Danger(단 거) 필수”
날로 늘어가는 의사의 너스레에 한바탕 웃으며 출근을 했다. 그 격려와 공감, 웃음 덕분인지 병원에 다녀온 후 전날보다 컨디션이 부쩍 좋아졌다. 하지만 얼굴이 핼쑥한 채 배를 움켜쥐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직원들 사이에 날 건드리지 말라는 무언의 지령이 떨어졌다.
주사를 맞고 약을 먹어서인지, 소문 때문에 아무도 날 건드리지 않아서인지, 어쨌든 통증이 한결 나아졌다. 아니, 주사도 약도 소문 때문도 아니고 어쩌면 의사의 그 너스레 같은 주문이 나를 괴롭혔던 마음을 잠재운 것일지도! 스트레스로 심신이 지친 나를 잠시나마 웃게 하려는 배려였는지도!
진지해서 더 재밌고 고마웠던 의사의 너스레 덕분에, 아픈 와중에도 웃을 수 있었던 하루. 그놈이 다시 거친 입을 놀릴라 치면 아프기 전에 미리 병원을 방문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