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날의 나는 조금 귀신에 홀린 사람 같았다.
여행을 떠나면 꼭 일출을 본다는 내 작은 규칙 때문에 새벽 네 시에 눈을 떴다.
어쩌면 새로운 해를 제대로 맞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작은언니와 경품에 당첨돼 다녀온 이후로 처음 찾은 제주였다.
이번엔 일행도 없이, 지난 해의 힘겨웠던 날들을 털어내기 위해 온 온전한 혼자만의 여행.
일출 명소를 찾아 나서기엔 흐리다는 예보가 마음에 걸렸지만, 일기예보는 늘 틀릴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길을 나섰다.
네비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던 중 방향이 조금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던 차는 어느새 한라산 기슭으로 올라가고 있었고 안개는 점점 짙어져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빙글빙글 이어지는 산길, 180도로 꺾이는 핸들, 흐려져 가는 시야.
일출이 아니라 내가 무사히 살아 내려갈 수 있을지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차를 세울 곳을 찾던 그때,
라이트 너머로 농장의 간판이 희미하게 보였다.
문이 열려 있어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 같은 커다란 문 앞에 차를 세우고 잠시만 어지럼을 가라앉히자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후레시 불빛 아래 나타난 사람은 털모자를 눌러쓴, 잠옷 위에 패딩을 걸친 50대 중반쯤의 농장 주인이었다.
그 한마디에 그동안의 상황을 구구절절 쏟아내고 말았다. 말을 다 듣고 난 그는 조용히 말했다.
“따뜻한 차 한 잔 마시고 쉬다 가요. 안에 집사람도 있어요.”
고맙지만 선뜻 들어갈 수 없었다.
세상이 너무 복잡해진 탓에, 이런 호의조차 경계하게 되는 게 조금 슬펐지만 정중히 사양하고 차 안에서만 쉬겠다고 했다.
잠시 뒤, 다시 창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번엔 안주인으로 보이는 아줌마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을 들고 서 있었다.
“잠시만 있다 갈게요.”
“어지럽다면서요. 천천히 가요.
그 말에 고개를 돌리니
안개가 조금씩 걷히고 여명이 스며들고 있었다.
“어, 저기서 해 뜨는 거죠?”
“네, 여기서 잘 보여요.”
한라산 자락에 있는 작은 농장에서 바라본 일출은 그동안 보았던 어떤 일출보다도 장관이었다.
마치 이곳에 오기 위해 그 모든 길을 돌아온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뜻하지 않은 날, 뜻하지 않은 길에서, 뜻밖의 사람들에게 받은 따뜻함 덕분에 혼자 떠난 제주 여행은 내게 가장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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