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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tman Jun 28.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29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29 순례길의 정상, 폰세바돈



‘아침 식사들 하러 오세요~’


아침 일찍 출발하기 위해 짐을 챙기고 있는 순례자들에게 Keith가 소리친다. 그리고 내게 다가와 어제 성당에서 성경 구절을 읽어줘서 고맙다며 두 손을 꼭 잡아준다. 종교가 없는 내게도 큰 울림이 있었던 미사였던지라 초대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아침식사가 준비된 부엌으로 들어서니 순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간소하지만 정성스럽게 차려진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갓 구운 바게뜨 빵과 잼, 지금 막 내려 놓은 진한 커피. 그리고 삶은 달걀까지. 감사한 마음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어제 잔돈이 없어 내지 못한 기부금을 내고 나온다. 

저 앞 마을 아래로 서서히 해가 떠오르는게 장관이다. 오늘은 폰세바돈 (Foncebadon)이라고 남은 여정에서 가장 높은 지점까지 산을 올라야 한다. 산길을 25킬로 넘게 걸어야 하니 10시간쯤 걸어야할 것이다. 긴 하루가 예상된다. 어제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자서 그런지 컨디션이 좋다. 몸도 몸이지만, 숙소에 도착해서 받은 따뜻한 환대가 여행 중의 피로함을 달래주었다.


떠오르는 태양을 등에 지고 서쪽 산 언덕을 향해 걷는데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다. 태양이 떠오르는 그 순간, 마지막 빛을 강하게 발해내고 있는 달. 한참을 서서 태양과 달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길을 재촉한다. 오늘은 가장 어려운 코스라고 알려진 폰세바돈까지 올라가야 한다. 피레네 산맥만큼 높은 곳이다. 해발 1600미터. 700-800미터 높이에 위치한 라바날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단숨에 올라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파른 오르막을 한참 올라야한다. 오늘따라 햇볕이 매우 뜨겁다. 제법 쌀쌀했던 아침 기온은 무더운 여름처럼 높아지고 있다. 걸쳤던 잠바와 티를벗고 민소매 티 하나만 입고 걷는다. 그래도 땀은 비오듯한다. 

오르막을 오를때 너무 속도를 줄이면 오르기가 더 힘들다. 적당한 속도의 규칙적인 발걸음으로 걸어야 다리에도 탄력이 붙어서 좀 더 씩씩하게 잘 걸어낼 수 있다. 오르막을 지나치게 힘겹게 오르면 내리막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무척 힘들다. 순례길 초반 북쪽길에서 여러 산을 넘으며 몸이 스스로 체득한 사실이다. 오늘 숙소가 있는 지점까지는 또 한참 내려가야 한다. 천미터 넘게 폰세바돈에서 내려가야 하므로 체력 조절을 잘하며 걸어야 한다.


조금 빠르다 싶은 정도로 오르막을 오르고 있는데, 내 앞에 다리가 조금 불편해 보이는 덩치 큰 남성이 걷고 있다. 지팡이를 짚었지만 왼쪽 다리와 팔이 불편해 보였다. 느릿한 걸음, 하지만 규칙적인 속도로 걸어가고 있다. 내가 앞질러 조금 더 가다가 되돌아보니 50대 중후반쯤 되어보인다. 뇌졸증이나 중풍 같은 질환을 앓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회복중이거나. 저 걸음으로 이곳까지 한걸음 한걸음 내딛었을 그의 힘겨운 여정. 이 높은 곳까지 포기하지 않고 힙겹게 걷고 있는 그에게 응원의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아무말 없이 지나쳤다. 삼사십분쯤 더 걷다가 잠시 쉬었다 가려고 벤치에 앉았다. 옆자리에 엄마와 딸로 보이는 여성 두명이 물을 마시며 쉬고 있었다. 눈인사를 나눈 뒤 나도 복숭아 하나를 꺼내 먹는다. 저 멀리 아까 내가 본 몸이 불편해 보였던 남성이 이쪽으로 걸어온다. 알고 보니 옆에 앉아 있는 두 여성은 그의 아내와 딸이다. 불편한 몸으로 천천히 걷는 그를,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이 길을 같은 속도로 걸을 수 없다. 빠른 걸음을 일부러 늦추거나, 느린 걸음을  빨리하면 더 쉽게 지친다. 각자의 속도는 다 다르다. 가족이든 친구든 이 길을 함께 걸을 때는 각자의 속도를 존중해야 한다. 내 걸음에 맞춰 빨리 걸으라고 재촉해서도 안되고, 일부러 천천히 걸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조금 떨어져 걷지만 서로를 배려하고 기다려주는 마음. 손을 붙잡고 걷지 않아도 그들은 서로에게 힘을 주고 서로 의지하며 걷고 있다.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의 걷는 모습을 지켜보는 딸의 마음이 아플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 대신 이 길을 걸을 수도, 아버지를 등에 업고 갈 수도 없다. 그저 끝까지 함께 걸을 수 있도록 그를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일. 그것이 가족이 할 수 있는 최선이며 그것이면 못할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 뒤로도 그들은 나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걸어갔다. 천천히 걷는 것 같지만 꾸준히 같은 걸음걸이로 걷던 그 남성은 나랑 비슷하게 오늘 종착지 마을에 도착했다. 나는 그보다 빠르게 걸었지만 중간에 더 오래 쉬어 결국 비슷한 속도로 걸은 것이다.  

오늘 가장 높은 지점인 폰세바돈(Foncebadon)에 도착했다. 두세가구가 전부인 아주 작은 마을. 산 정상은 텅 빈 공터같다. 해발 1600미터의 이곳, 폰세바돈은 수도사 가우셀모가 철십자가를 세웠고 순례자들은 고향에서 돌을 가져와 그 십자가 앞에 내려놓음으로써 자신의 죄를 벗고, 걱정 근심을 내려놓고, 소원을 담아 기도를 올리는 곳이다. 산티아고 순례자길에 대한 책이나 블로그에서 이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힘겨운 여정에서 무언가 복받쳐 오르는 순간, 높이 솟은 십자가 아래서 두 손 모아 오래오래 기도를 올렸다는 사람들. 과연 어떤 곳일까 궁금했다. 십자가 앞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순례자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기도를 하거나, 돌을 올려놓고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높이 솟은 십자가, 그리고 수천 수만개의 돌로 쌓여진 돌무더기. 순례자길의 정점, 이곳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이 모두에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오래토록 머물면서 지나온 여정을 되돌아보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서서 물을 마신 후 곧 자리를 떴다. 돌을 하나 쌓아 올리며 기도를 할 수도 있었지만, 무언가 의미를 애써 찾으려 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무언가 느껴지면 느껴지는대로, 아니면 아닌대로. 


이곳부터는 이제 내리막 길이다. 먼지 나는 흙길. 나무그늘 없는 산. 여러개의 산등성을 넘어넘어 한참을 내려가야 한다. 

내리막길에서는 무릎에 무리가 더 가기에 조심히 걸어야 한다. 오르막보다 덜 힘들다고 서둘러 걸어서는 안된다. 그럴수록 다리에 힘을 주어 천천히 걸어야 한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저 멀리 까만 지붕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 묵어갈, 아름답기로 유명한 마을 Molinaseca 다.


열시간을 온종일 걸었지만, 큰 무리없이 잘 걸어내서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온몸이 타들어가듯 목이 마르다. 이 순간 시원한 맥주 한잔과 샤워가 간절하다.


Distance: Rabanal del camino  – Molinaseca (26킬로) 
Time for walking:  7:30 am – 5:30 pm 
Stay: 호스텔
A thing to throw away: 압박붕대 (근육에 무리가 가거나 발목이 삐끗하면 감을 수 있는 압박 붕대를 두개 가져왔다. 부피가 꽤 크지만, 혹시 다칠지 몰라 계속 넣어두었으나, 이제 힘든 코스는 거의 다 걸었다. 필요한 일이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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