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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tman Jul 05. 2020

순례자의 시작과 끝 Day 31

45일, 매일매일 버리며 걷기


Day 31 스페인의 포도밭, 그리고 와인


어젯밤에도, 내가 과연 내일 아침 일어나 더 걸어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몸과 마음 상태로 잠이 들었다. 아침 8시가 되자 기상을 외치는 음악 소리가 들린다. 뻐근한 몸을 이끌고 공동 샤워장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와 가방을 싸고, 언제 그랬냐는듯이 다시 길을 나선다. 왜 나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자고 났더니 몸 상태는 어제보다 조금 나아졌지만, 이미 많이 누적된 피로 때문에 금새 지치고 있는 요즘 며칠이다. 오늘은 무리하지 말아야겠다. 20킬로만 걷자. 한시간쯤 걸은 후 만난 작은 마을의 레스토랑에서 크라상과 카페 콘 라체를 마신다. 

빽빽한 숲길, 밀밭, 해바라기 밭, 옥수수 밭을 거쳐, 오늘은 포도밭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한다. 스페인으로 들어선 첫날부터 순례자 저녁 메뉴와 함께 나온 와인 맛에 반했었다. 갈증 때문이었는지, 몸의 피로때문이었는지, 붉은 피처럼 온몸으로 달콤하게 스며드는 그 첫잔의 와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강렬하게 내려쪼이는 태양볕에 짙게 익어가는 포도로 만들어진 와인이기에, 그 어느 곳에서 생산된 와인보다 맛이 깊고 달콤하다. 그래서 여성들이 특히 좋아한다는 스페인 와인. 물보다 저렴할 정도로 많이 생산되고, 그만큼 많이 마시는 와인. 나도 저녁 메뉴에 딸려 나오는 와인을 매일 마시고 있다. 내가 마셔온 와인도 내 눈 앞에 열린 이 포도알로부터 만들어졌겠지. 초록부터 짙은 보라색을 띈 포도알까지 주렁주얼 열린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너무나 탐스럽게 열린 포도 열매 앞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들여다본다. 한송이 따서 맛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는다. 수천수만평의 포도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한참을 걷고 있는데 길 안쪽으로 짙은 보랏빛 포도 몇송이가 열려 있는 걸 발견했다. 포도밭과는 이삼미터 떨어진 곳이고, 포도밭에 열린 포도송이에 비해선 알이 매우 작다. 포도씨가 바람에 날라와 뿌리를 내려 야생으로 열린 작은 포도 나무다. 길가에 난 포도열매를 두세송이 땄다. 손으로 쓱 문질러 한알을 입에 넣으니, 달콤한 향이 입안가득 번진다. 이렇게 단 포도는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다. 한여름의 한국 포도도 매우 맛있지만, 당도는 이 스페인 포도를 따라올 수가 없다. 태양의 강도가 곧 포도의 당도일터. 


포도밭을 따라 반나절쯤 걸었을까. Villafranca라는 마을을 지나서 다음 마을로 향해가는 길 중 두 갈랫길을 만났다. 하나는 산길을 타고 넘어가는 길과, 다른 하나는 산길 아래 도로 옆을 따라 걷는 조금 수월한 길이 있다. 몇몇 순례자들은 산길을 따라 걷겠다며 우루루 앞서 나간다. 양갈래 길 앞에서 잠시 멈춰선다.

여지껏 순례자길을 걸으면서 만난 갈랫길에서 난 항상 더 힘든 길을 선택해 왔었다. 그것이 조금 더 짧은 거리여서인 적도 있었고, 힘든 길 위에서 더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수월한 길로 가기로 한다. 매번 하나의 기준을 두고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을 ‘주관’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판단 기준을 세운 나의 생각이 항상 옳은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해 두어야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다. 나와 다른 의견에 귀 기울이려면, 나와 생각이 달라도 틀린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한다. 따라서 내가 습관적으로 하는 생각이나 행동의 패턴을 잠시 바꿔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 선택이 기존의 내 생각과 어떻게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 과정은 또 어떻게 다른지를 경험해 보는 것. 그런 경험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밑바탕이 되며 독단적인 사고를 되짚어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오늘은 큰 도로 옆 순례자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좁은 흙길을 따라 걷는다. 왼쪽 아래로는  야트막한 개울물이 흐르고 있고, 그 물소리는 청명한 노래가 되어 온 산을 감싼다. 오늘따라 순례자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아니면 대부분 산길을 택해서 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저 멀리 나처럼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여성이 보인다. 헐렁한 하얀 바지에 분홍색 상의을 입고, 큰 챙모자를 쓰고 나무 지팡이를 설렁설렁 짚으며 걸어가는 그녀는 집앞 산책하듯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걷고 있다. 별로 힘들어 보이지도, 땀을 흘리는 것 같지도 않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조금 더 걸어가니, 왼쪽 개울가로 내려갈 수 있는 작은 틈이 있고, 개울가 바위 위에 그녀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명상을 하는건지 양손을 모으고 바른 자세로 앉아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있었다. 멀리서도 그녀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걷다보면 때론 조급한 마음이 들곤 한다. 빨리 걸어야 숙소에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하고 그래야 괜찮은 숙소를 구할 가능성도 커진다. 그런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쓸데없는 걱정일랑 집워치우라고 외친다. 숙소를 못 구해 길 위에서 보낸 날은 단 하루도 없다. 몇번 숙소가 다 차서 고생한 적은 있지만, 항상 어떻게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인간이 죽으란 법은 없다는 말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문제의 해결책은 나타난다. 그러니 제발 그런 기우는 집워 치우고 찬 개울물에 뜨겁게 달구어진 두 발이나 담그자. 


말하지 않아도,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저 멀리 앉아 쉬고 있는 그녀의 여유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긴장, 경쟁, 경계, 불안, 불편함은 말과 행동이 아닌 에너지로 전해진다. 그 에너지는 아주 멀리까지도 금새 전달되어 주변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반대의 감정도 마찬가지. 지금 그녀의 펀안함이 내게 전달되는 것처럼. 그녀가 아니었으면 이 아래까지 낑낑대며 내려와 물에 발을 담그지 않았을 것이다.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고 싶었지만, 일이십분 쉬기보다 조금 더 먼저 가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 하지만 발을 담그고 나니 빨리 가는 것이 도대채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어제 했던 생각을, 어리석게도 오늘 또 반복한다. 천천히 가도 늦지 않는다. 놀멍쉬멍 그렇게 천천히 가도 되는 길이다. 아무도 빨리 걸으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내 속의 내 목소리 외엔.


Distance: Cacabalos - Trabadelo (20km) 
Time for walking:  8:00 am – 4:00 pm 
Stay: 사설 알베르게 
A thing to throw away: 반바지 (날이 서늘해져서 더운날 편히 입던 반바지는 없어도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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