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슬픔의 틈새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학업을 포기하고, 해가 뜨기 전 나가 달을 보며 귀가했다는 맏딸의 이야기는 이제 고전처럼 들립니다. 자식들 도시락을 싸기 위해 새벽 4~5시에 일어나고, 온종일 부엌에 서서 대가족의 끼니를 챙겨야 했던 시절. 우리에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같이 들리지만, 사실 이건 우리 부모님과 조부모님이 온몸으로 통과해 온 실제 삶입니다.
그에 비해 요즘의 살림은 문명의 혜택을 톡톡히 누립니다. 빨래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알아서 하고, 요리할 땐 언제든 편하게 가스불을 켤 수 있죠. 필요한 식재료는 손가락 몇 번 움직이면 다음 날 새벽 문 앞에 도착합니다. 챙겨야 할 식구도 조촐해졌고, 하기 싫은 날엔 밀키트나 배달 음식이라는 선택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여전히 살림이 버겁고, 반복되는 일상에 지칠 때가 있습니다. 분명 더 편해진 삶인데, 왜일까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속 애순이의 집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아주 먼 과거의 풍경이라 생각했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때고, 화장실이 집 밖에 있는 그 집. 그런데 저희 어머니는 그 집이 당신의 고향 집과 꼭 닮았다고 하시더군요. 그제야 실감이 났습니다. 그 고단했던 삶이 결코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요.
어머니의 고향 집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외할머니로 이어집니다. 여성의 희생이 당연시되던 시절, 외할머니는 7남매를 키우며 시집살이에 밭일과 집안일을 묵묵히 해내셨죠. 어린 시절의 어머니가 보아도 외할머니의 하루가 힘들어 보였나 봅니다. 어머니는 혹여나 할머니가 그 고단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식들을 둔 채 어디론가 떠나버릴까 봐 늘 불안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도망가는 대신 그 자리를 지켰고, 끝까지 자식들을 키워내셨습니다.
소설 《슬픔의 틈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고단함에 '역사의 비극'까지 더해진 이들의 삶을 보여줍니다. 1943년, 어린 나이에 가족을 따라 아버지가 징용된 사할린 탄광촌으로 이주해야 했던 소녀 단옥과 그녀의 가족들의 연대기입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해일 속에서 가족과 생이별하고, 낯선 땅에서 차별과 멸시를 견디며, 고향으로 돌아갈 길조차 막혀 타국에서 뿌리내려야 했던 한인의 여정.
"1966년 소련의 무인 탐사선이 세계 최초로 달에 착륙했다. 정부에서는 그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전했지만, 한인들은 달나라도 가는 세상에 자신들은 어째서 고향에 가지 못하는지, 더 큰 박탈감과 상실감을 느꼈다." - 《슬픔의 틈새》 중에서 -
소설을 읽으며 저는 오래전 기억 하나가 자꾸 떠올랐습니다. 대학원 시절, 우리나라 어업문화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해 전국의 어업인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었죠. 30년 넘게 거친 파도를 타온 분들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였습니다. 드라마 속 관식이처럼 바다로 나갔던 이들, 그리고 세탁기 하나 없이 그 뒷바라지를 고스란히 감당했던 아내들. 그 삶들이 켜켜이 쌓여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다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습니다.
인터뷰를 하면서 놀라웠던 건, 그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당시의 고생을 눈물로 호소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덤덤하게 옛 기억을 꺼내놓는 그분들 앞에서, 듣고 있던 제가 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그 모진 세월을 견디셨어요?"라는 질문에 그분들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그냥 그게 삶이고 일상이니까 하는 거지, 별게 있나."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덤덤하게 당신들의 인생을 이야기하던 그분들처럼, 단옥 역시 자신의 고통을 비극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작가는 그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단옥이 발견하는 찰나의 기쁨과 즐거움을 세밀하게 포착합니다.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일들은 이렇듯 늘 슬픔과 고통의 틈새를 비집고 모습을 드러냈다." - 《슬픔의 틈새》 중에서 -
소설 속 단옥의 삶을 통해 타국에서 뿌리를 내려야 했던 이들에 대한 안쓰러움과 동정 대신 존경심을 느꼈습니다. 외할머니와 바다에서 만난 어업인들에게서 느꼈던 그 끈질긴 강인함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 그것이 그분들의 공통점이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 이금이 작가는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고국을 떠나야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3부작으로 펴냈고, 《슬픔의 틈새》는 그 마지막 소설입니다. 소설이지만 역사적 디테일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읽는 내내 실존 인물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타국에서 뿌리내린 한인들의 삶을 이토록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비록 가상의 인물들이지만, 이들을 통해 타인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소설이 가진 가장 큰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삶이 막막하고 번아웃이 찾아올 때, 이 책을 펼쳐보시길 권합니다. 우리보다 앞서 그 길을 걸어간 이들이 삶을 어떻게 불렀는지를 보고 나면, 번아웃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있던 우리의 나약함을 꾸짖기보다 어떤 풍랑 속에서도 기어이 기쁨의 틈새를 찾아냈던 그분들의 강인함이 우리 안에도 흐르고 있음을 깨닫게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