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 때마다 돌아갈 ‘안전기지’가 있으신가요?

feat. Michelle Branch <Hotel Paper>

by 앙꼬

지금은 아득해 보이지만 모두가 지나왔던 사춘기. 혹시 기억나시나요? 누가 시비를 거는 것도 아닌데 온 세상이 나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는 것만 같던, 그래서 갈 곳 없는 반항심만 가득했던 시기였죠.

​세상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의식하며 살았지만, 정작 나를 가장 유심히 관찰한 건 거울 속의 저 자신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온갖 심리테스트를 뒤적거렸고, 전에는 관심도 없던 TV 속 연예인들이 갑자기 근사해 보이기 시작했죠.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꼭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고, 오직 노래 속 세상만이 나를 온전히 이해해 주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마음 주위에 울타리를 치기 시작했고, 담장을 조금씩 높이며 그 안의 세상에 푹 빠져 지냈습니다.

​덕분에 저희 어머니는 당시의 제가 얼마나 까칠했는지 지금도 혀를 내두르곤 하십니다. 눈치 보시느라 고생 많았다고요. 당시 밖으로 분출하지 않고 저만의 세상을 만들어 그 안으로 파고들었던 이유가 내향적인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엄마만 졸졸 따르던 아이에서 ‘나’라는 독립적인 존재로 넘어가기 위한 성장통이었건 것 같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게는 제 방이 따로 있었고, 그 안에서 저만의 세계는 점점 견고해졌습니다. 그 세계가 외롭지 않게 버텨준 건 저를 깊이 위로하고 함께 울고 웃어주던 ‘친구들’ 덕분이었습니다. 바로 음악입니다. 에이브릴 라빈, 브리트니 스피어스, 힐러리 더프,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제 사춘기를 지탱해 준 소중한 베스트프렌드들이었죠.

예민함이 극에 달했던 그 시절, 가사를 다 이해하진 못해도 그들이 들려주는 멜로디는 제 방 안의 공기를 온기로 채워주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즐겨 들었던 건 록(Rock) 장르였습니다. 아마 마음속에 끓어오르던 반항심 때문이었겠지요. 에이브릴 라빈이 10대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얻은 이유도 비슷할 겁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녀만큼이나 아꼈던, 지금 들어도 명반이라 부르기에 주저함이 없는 앨범이 하나 더 있습니다.

​미셀 브랜치(Michelle Branch)의 <Hotel Paper>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큰 인기를 얻었던 에이브릴 라빈의 1집이 10대의 날 선 반항을 대변했다면, 미셀 브랜치의 음악은 기타 중심의 포크록 장르를 유지하면서도 조금 더 성숙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단순한 우울이나 예민함에 그치지 않고, 2000년대 초반의 향수를 품은 채 감성적인 멜로디를 들려주죠. ​싱어송라이터인 그녀는 이 앨범의 전곡 작곡에 참여했습니다. 투어를 다니며 호텔을 전전하던 시기에 느꼈던 외로움과 공허함, 그리움 같은 정서가 곡마다 짙게 배어 있습니다.

​사실 그녀가 10대 중반에 썼던 'Goodbye to You'나 'Everywhere' 같은 초기 곡들은 사춘기의 풋풋한 감성이 물씬 풍깁니다. 그런 감성을 담았던 첫 앨범 이후, 성인이 되어 발표한 두 번째 앨범 <Hotel Paper>는 훨씬 세련되고 다듬어진 느낌을 줍니다. 'Are You Happy Now?'나 'Breathe' 같은 수록곡들은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아마도 제 사춘기를 함께 통과한 오랜 친구 같은 음악이라 그렇겠지요.

​그래서일까요. 집중이 필요한 작업을 앞두고 마음이 잡히지 않을 때 저는 여전히 이 앨범을 꺼내 듭니다. 기분 좋은 리듬에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새 하기 싫던 일에도 몰입하게 됩니다. 인생의 특정 시기를 함께 통과한 플레이리스트가 있다는 건 생각보다 큰 힘이 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음악보다 그 시절의 플레이리스트로 자꾸 돌아가게 되는 걸 보면서, 그때 음악을 깊이 향유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그러한 경험들은 인생이 힘들 때마다 꺼내볼 수 있는 평생의 자원이 되니까요.

그래서인지 제 아들도 자신만의 취향을 쌓아가면서 언제든 꺼내 들 수 있는 플레이리스트가 생기길 바랍니다. 이제 겨우 여섯 살인 아들은 연신 "엄마 좋아"를 외칩니다. 웬만한 딸 못지않게 애교가 많고 애정 표현도 서슴지 않죠. 슬프거나 힘들 때면 가장 먼저 저를 찾습니다. 아이에게 저는 ‘안전기지’인 셈입니다. 그럴 때면 저는 아이를 꽉 안아주며 볼을 맞댑니다. 언제나 저를 찾아오는 아이 덕분에 부모인 제가 오히려 넘치는 사랑을 받는 중이지요.

​하지만 저 역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걸 압니다. 아이가 학교에 가고 친구가 생기고, 엄마의 손을 부끄러워하며 슬그머니 놓게 될 날이 오겠지요. 스킨십이라도 하려 들면 기겁하며 물러설지도 모릅니다. 생각만 해도 벌써 서운해지지만, 그 시기는 건강한 성인으로 자라나기 위해 꼭 거쳐야 할 관문임을 이해합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겉모습은 아빠를 닮았지만 성격은 저를 꼭 닮은 아이는, 언젠가 저처럼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만의 세상을 지어 나갈 겁니다. 속상한 일이 생기면 더 깊이 그 안으로 숨어들겠지요. 그땐 저를 대신해 아들과 그 시간을 버텨줄, 아이만의 안전기지가 있기를, 그리고 그게 음악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사춘기 소녀였던 저를 다독여주던 미셀 브랜치의 음악이 30대 후반이 된 저를 여전히 위로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와 비슷한 시대를 지나온 분들이라면 미셀 브랜치를 기억하실 겁니다. 오랜만에 그녀의 음악을 다시 한번 들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잊고 지낸 과거의 감성 속으로 잠시 시간 여행을 다녀올 수 있을 겁니다. 만약 그녀의 음악을 모른다 하더라도 에이브릴 라빈이나 힐러리 더프 스타일을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면 기꺼이 추천하고 싶습니다. 2000년대 초반 포크록의 정수가 담긴, 참 근사한 명반이니까요.

이전 13화​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 때